강구현/ 시인/ 영광신문 편집위원

연록의 사이사이를 가득 채웠던 온갖 꽃들이 피었다 지는 오월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다가선 유월은 이제 꽃이 진 그 틈새를 짙푸른 초록으로 채워가는 계절이다.

하루가 다르게 짙어가는 초록을 바라보며 323년 전의 5월과 6월의 영광을 회상한다.

1985년은 80년 광주의 오월을 짖밟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과 군부의 폭압에 온 국민이 주눅들어 있을 때였다. 광주의 재야원로 중 한 사람이었던 고홍남순 변호사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상경을 했다.

국내 명망 있는 재야인사들과 양심세력들을 찾아다니며 ''더 이상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군부에게 빼앗겨서는 안되니 전국적인 민주회복단체를 구성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절망적인 대답을 안고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우선 전남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조직된 단체가 바로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약칭 전민협)였다. 광주에세 시작해 전국적인 투쟁조직으로 확대시켜나가기 위해 ''국민''이란 단어를 넣었다, 그렇게 탄생된 전민협은 홍남순 변호사의 집이자 사무실이었던 광주에 본부를 두고 각 군단위 지부를 결성해나갔다.

영광도 지부가 결성되고 조직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기층조직인 각 읍면지회까지 확장시켜나갔다.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앞에서 드러내놓고 반독재투쟁조직에 가담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삶을 거의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행정으로부터 모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대부분의 주변사람들조차 그런 조직원들의 등에 대고 손가락질 하며 심지어는 빨갱이들이라고 까지 비난했다.

이듬해인 1986년 전민협 영광군지부는 천주교 산하의 카톨릭 농민회와 연대하여 다시 ''영광군 민주회복 인간화협의회''를 구성하고 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조직의 힘을 키워나가면서 조직원 단합대회, 이념교육 등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그리고 1987,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라는 전국적인 투쟁조직이 결성되었다. 영광에서도 전민협과 카농회원들이 자연스럽게 국본에 가담했고 서울대생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3.3대행진을 필두로 해서 6.10 항쟁, 6.26대회등을 주도해나갔다. 광주, 서울 등을 비롯해 반독재투쟁 집회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라도 달려가 시위에 참여하면서 그 지독한 최루탄, 지랄탄에 맨몸으로 맞섰고, 그 무자비한 백골단의 곤봉세례에 머리가 터지고 군화발에 짖밟히며 닭장차에 끌려가서도 결코 투쟁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타오른 민주화투쟁의 불길을 감당할 수 없없던 군부는 6.26대회를 정점으로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 의해 6.29선언을 하였고, 그 선언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 언론 기본법 폐지, 중요정치인 해금ㆍㆍ등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후속조치들이 실행되었다. 그 때 우리는 6.29선언을 국민의 힘에 의한 독재정권의 항복선언이리 규정했다.

세상은 급속히 달라졌다. 반독재투쟁으로 일관했던 단체가 각 분야별로 세분화 되면서

노동운동, 농민운동, 교육운동, 어민운동, 환경운동..등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일부 세력들은 정치조직으로 갈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6.29 선언과 함께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에세 제반민주세력들은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에 휘말리면서 사분오열로 갈라지고, 권력욕에 눈이 먼 정치지도자들은 대통령병에 걸려 야권을 분열시켰으며 재야세력들조차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분열되었다. 이에 영광에서는 ''군부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삼당야합의 민자당이 있는한 아직도 민주화는 이루워지지 않았다.''는 인식하에 민주쟁취, 민중해방, 민족통일이라는 강령을 이념으로 하는 ''민족민주민중운동연합''(약칭 민민연')이란 조직이 탄생되기도 했다.

특이한 현상의 하나로 대선정국에 접어들면서부터는 6.29선언 이전 민주화투쟁에 헌신했던 세력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열악해질대로 열악해진 상황이라 그 경제적 취약성으로 인해 정치현장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자본력을 앞세운 군부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세력들까지도 달라진 세상의 주인공 노릇을 하게 되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그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6.29선언 이전 개인적인 삶을 포기한 채 모든 것을 민주화 투쟁에 송두리째 바쳐버렸던 그 투사들 중 몇 분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지만 짙푸른 유월의 초록에 묻혀 잠이 든 채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노구를 이끌고 가투에 동참했던 영광읍의 고 이강표 님, 박동흔 님, 백수읍의 배응봉 님을 비롯해 홍농읍의 김희 님 영광읍의 카농출신 정병온 님, 염산면의 강상규 님, 백수읍의 장경수 님 등이 그들이다.

이 나라가 암담했던 시절 그 분들은 분명 오늘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5월의 꽃이었고, 6월의 신록이었다.

세상이 달라지자 득세하기 시작한 자본의 힘에 밀려 극도의 소외감 속에서 살다가 쓸흘히 죽어간 그 분들의 영령 앞에 오늘 우리는 합동 추모제라도 올려야 할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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