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 시인/ 영광신문 편집위원

꿈도 희망도 다 접고 살아온지 오래인데, 그래도 한가지 꿈만은 버리지 말아야겠구나.

신용불량자에게도 그런 희망의 끈이 있다는 걸 여태 몰랐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아무런 생산기반조차 없이 깔끔하게 날려버리고 그 나머지의 재산(?)인 몇 억대의 부채.

그래도 건강한 육신 하나로 이리저리 부딫히며 악착 같이 살았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발버둥쳐도 빛더미는 줄어들지 않고, 막노동으로 몇푼씩 벌어서 원금 갚아봐야 늘어나는 이자가 오히려 원금보다 더 많아져서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다.

아래턱 빼서 위턱 막고 위턱 빼서 아래턱 막고...그나마도 신불자가 아닐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뭔 지랄헌다고 결혼까지 해서 남의 집 귀한 딸까지 시댁의 부채를 짊어지고 평생을 편안히 발뻗고 잘 수조차 없게 만들었을꼬?

누굴 원망할 수는 없었지만 ''차라리 나 혼자서 감당하고 말았어야 할걸'' 하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남에게 내밀 수 있는 단 하나의 명함이라면 사형수의 올가미처럼 늘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신용불량자(信用不良者)라는 형벌이었다.

그렇게 저렇게 꿈조차 희망조차 포기하고 용케도 견디어 온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어느덧 자식들이 성장하고 보니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자식들에게 유산은 못물려 주더라도 빛 더미만큼은 안겨주지 말아야 할텬데...''

그런저런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던 어느 여름날 저녁, 복날이 낼모래인데 심각한 표정의 견공의회(犬公議會) 의원님들이나 계란줄께나 흥정한다는 모범 견공들의 참담하도록 슬픈 표정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나에게도 그 어둠을 환희 밝혀줄 섬광 같은 희망이 생겼다.

''그래, 바로 그거야, 지금까지 걸고 다녔던 모가지의 올가미가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구나.''

''자살''이라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희망이 있음을 난 여태 모르고 살있다.

그런데 한 가지 그 희망조차에도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나도 대통령처럼, 국회의원처럼 그럴싸 하게 유서 몇 줄 남기고 자살을 하게 된다면 나의 부채도 없어질 수 있을까? 실뱀장어 치어 다섯마리 불법(不法)으로 잡았다고 부과된 범칙금 200만원도 면제 될까? 그 범칙금 제 날짜에 못내면 하루 10만원씩 계산해서 잡아다가 강제 노역 시킨다는데...그런 것도 다 해결될까? 지난 날 나의 허물도 다 덮어버리고 좋은 부분만 미화될 수 있을까?

아마 그럴거야.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인권국가이고 법치국가인데, 아무리 미천한 나도 이 나라 국민인데...''

''어렸을 때 학교에서 친구 도시락 몰래 훔쳐먹은 것도. 사춘기 시절 지나가는 여학생 얼굴 몰래 훔쳐본 것도...유서에다 솔직히 고백하면 다 용서 받을 수 있을거야.

''미투''에도 안걸리고, 훔친 물건이나 , 그 범죄 행위의 과정에 대한 모든 수사도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고 바로 종결지을거야. 왜냐하면 유서에다 솔직히 다 밝히고 자살했으니까.''

''돈은 받았으나 대가성은 없었다고 솔직하게 유서를 남기면 되니까.''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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