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영광신문 편집위원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의 일이다.

장차 천하를 통일하게 될 진나라와 강태공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제나라가 양대 강국을 이루고 있는 틈새에 남쪽에 자리한 초나라가 등거리외교로 겨우겨우 위기를 모면해 가고 있었다.

초나라의 신하들도 진과 제의 두 편으로 파가 갈려 우왕좌왕하고 있을 무렵, 약관의 나이에 좌도관(오늘날의 부수상)의 벼슬에 오른 굴원(屈原)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그는 제나라와 힘을 합쳐 야심을 품은 진나라를 쳐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당시 초나라의 회왕은 굴원을 불러 부국강병을 위한 새 헌령을 만들도록 하명한다.

그러나 새 헌령을 두려워 한 귀족들이 왕세자인 자란을 앞세워 왕에게 거짓을 고하고 누명을 씌워 굴원을 멀리 변방의 한직으로 쫓아버리고 만다.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굴원이 쫓겨나자 진나라에서는 초나라에 약간의 땅을 선물로 주면서 협약까지 맺는다.

그 후 위협을 느낀 제나라가 다른 제후국들과 연대하여 초나라에 쳐들어 왔으며 초나라는 진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태자를 인질로 보낸 후에야 원군이 도착을 함으로써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초나라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태자가 볼모지에서 탈출하는 사고를 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이번에는 진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연대해서 초나라를 침략하였으며 초나라는 또 한 번 수많은 병력과 국토를 잃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우위에 서게 된 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문관이라는 곳에서 두 왕이 서로 만나 담판을 짓자고 제의를 해온다.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초나라에서는 왕끼리 만나 형제지국을 맺는다면 나라가 평온해질 것이라며 진의 제의에 응하도록 결정을 내린다.

드디어 초나라 회왕의 행렬이 진나라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변방에 밀려나 있던 굴원이 나타나 무릎을 꿇고 중단할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신하들은 대왕의 장도에 재를 뿌린다며 굴원을 밀쳐내 버리고, 멍하니 행렬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그는 대성통곡을 했다고 전한다.

굴원의 충언을 무시했던 회왕은 결국 진나라에 억류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더니만 3년 후 그곳에서 죽게 된다.

초나라에선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던 태자를 불러 왕위에 앉히게 되지만, 신하들의 잘못된 판단이 왕을 적국에서 죽게 했다며 거세게 항의를 했던 굴원은 그나마 변방의 낮은 관직에서 마저 쫓겨나고 만다.

초나라 경양왕 27년에 진나라 장수 백기가 드디어 초나라 수도를 함락시키고 선왕들의 무덤에 불을 지르자 굴원은 산발을 한 체 울부짖고 다녔다고 한다.

모두가 흐려 있는데 나만 밝도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도다. 때문에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이곳에 온 것이다.”며 음력 55일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품고 도도히 흐르는 역라수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어부들이 뛰어나와 굴원을 건지려 했으나 소용돌이치는 거센 물살로 인해 그를 찾지 못했다.

어부들은 물고기떼가 그의 살을 탐낼까 두려워 물속에 쌀을 풀어주었는데 그때부터 단옷날 대나무통에 휜 쌀을 담아 물에 뿌리며 굴원의 넋을 달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왕의 보고 듣는 것이 총명치 못하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며 그 비통한 마음을 글로 적어내려 간 것이 그 유명한 굴원의 장편서사시 이소(離騷)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충신 굴원에 대해 다소 지루하게 적시하였다.

어쩌면 요즈음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를 답습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찹찹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은 비단 필자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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