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3.1 운동 광주·전남권에서 두 번째로 14일에 대한독립만세

영광의 3·1운동은 310일의 광주에 이어 광주·전남권에서 두 번째로 14일에 전개되었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곧바로 3·1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강인한 의향정신이 영광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찍부터 위계후 · 조철현 등과 같이 신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자각한 인물들의 주도 속에서 적극 전개될 수 있었다고 인식된다.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항일운동 주도층으로 대두하여 1920년대 이후 영광의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영광에 있어 14 · 15일의 만세운동은 최초의 점화단계이자 단시간에 최고조에 달했던 지역적 성격을 지닌다.

15일에는 영광경찰서까지 진입할 정도로 독립쟁취와 수감자 석방의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영광의 높은 독립의지가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서울에서 귀향한 조철현 · 류 일과 국장에 참여한 노 준 일행, 영광에서 독자적으로 거사계획을 가진 영광보통학교 교사 이병영 등과 학생들 그리고 정인영, 정헌모 등이 처음부터 합세하여 실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주도 속에서 이틀 동안 거의 1,000여명 이상의 대규모 군민들이 대대적으로 합세하고, 시위대 앞뒤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할 정도로 운동의 전 과정을 매우 치밀하게 실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일제가 만세시위가 광기와 같았다고 지적하고, 지도층들이 남들보다 한층 더 즐거운 기분으로 크게외쳤다는 사실을 통해 영광인의 독립쟁취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광의 3·1운동은 오랜 염원이었던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식민통치의 무력탄압장치인 영광경찰서에 쇄도 진입함으로써 처음부터 강도 높은 항거이자 독립 제창의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에 놀란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1차 운동을 탄압했던 것이며, 이후 영광 전 지역의 동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차단하였다. 그러나 영광에 있어서 만세운동은 15일 이후 민족독립의 의지를 환기시키면서 영광 전 지역에 확산되었다.

이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1차 시위를 이은 영광읍과 법성포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327일 영광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을 이룬 만세운동은 시위행진 단계에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1차의 연장선상에서 계획 진행되었고, 일련의 애국가 삐라 살포와 태극기 제작 등이 실행되었던 것이므로 이를 미발사건이 아닌 만세운동으로 적극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영광의 3·1운동 과정에서 영광·법성 보통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활동은 주도적이었다.

 

영광대교회 3.1 운동 참여교회(100주년 기념)로 공식 인정받다

영광대교회 위계후 조사(助事)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1919. 3. 14 ~ 3. 15)이 영광에서 세 차례 이뤄지다”.

영광대교회는 190557일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Eugene Bell)선교사의 전도 열매로 영광읍 무령리에 세워졌다. 설립 114년이 되는 교회로서 한국교회 역사의 초창기 기억부터 소중히 간직한 교회이다. 교리, 신학적으로 정통 보수교단이며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에 소속되어 있는 영광대교회가 3.1 운동 참여교회(100주년 기념)로 한국 기독교(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우리 지역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19193. 1에 일어났던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기독교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교회로 영광대교회가 지정된 것은 일제 식민치하에서 민족애를 깨우고 독립의지를 불태웠던 우리 지역의 선각자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20세기는 식민지, 남북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앙은 한국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었으며, 오늘날 기독교는 한국 민족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하게 되었다. 지난 한 세기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는 정치적 상황의 한복판에 서서 선교활동을 전개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회 정치적 기능에서 볼 때 기독교는 한국인의 고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영광의 기독교 전래 이후 그 성장의 이면에도 이런 아픈 민족사의 역사와 함께 하듯이 영광의 기독교 전래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의 기독교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민족의식이 강하고 자발적인 의지를 가진 지역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무령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영광대교회는 이후 영광읍교회라는 이름을 쓰다가 2002년부터 지금의 영광대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영광대교회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때는 지역사회에서 외부와의 정보교환을 위한 거점 및 연락망의 역할, 지역민들을 위한 근대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간이학교 및 주일학교 운영 그리고 부흥회 및 사경회 개최, 민족문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지역민들의 본보기 역할 등을 했다. 이와 같이 지역사회에서 영광대교회 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 예가 바로 일제 강점기 때 영광대교회의 조사(助事, helper)(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직분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선교초기에 한국인 목사가 양성되지 못할 때 선교사들을 도와서 전도, 치리, 순회심방 등을 했다)로 시무했던 위계후(魏啓厚)를 중심으로 1914년 기독교를 통한 배일(排日)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민족의식 교육으로 펼친 항일운동은 영광보통학교 생도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 314일과 15일에 영광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순수한 신앙의 열정들을 키워왔다

위계후 조사는 담양 출신으로 담양군 창평면 정오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광주 농업학교를 다니면서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졸업(1회 졸업)한 후 1914년 나이 30세 때에 영광에 와서 조운의 딸과 결혼하고 영광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였고, 1915105일 당시 영광읍교회 지금 영광대교회의 조사(助師)로 시무하였다. 그는 또한 강한 민족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1905. 11. 17)1910년에 공포 되었던 한국합병에 관한 조약’(1910. 8. 22. 조인, 29일 공포)에 의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곳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191931을 기해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영광에서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위계후 조사에 대해 정종 박사의 증언은 영광대교회 100주년 기념의 해에.” 나의 유년시절과 영광교회, 영광신문 특별기고(2005129) 445.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880년대 창평 출신인 위계후 선생이 전도사 자격으로 내령하여 교회 안팎으로 유위유능한 지도력을 발휘했고, 정식목사가 교회 일을 전담하면서부터는 자유로운 신분으로 영광사회 전반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됨으로써 19389, 조선 전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른바체육단사건의 총책임자로 지명돼 옥고를 치르게 된다(중앙로와 현암로가 교차되는 네거리로서 향교까지의 길을 그의 아호를 따 해인로로 명명한 장진기 시인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서울에서 점화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남 지역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3일이었으나, 만세 시위는 310에 광주에서 있었다. 광주에서는 미션계 학교를 중심으로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 등 3개 학교 학생이 주축이 되어 확산되었다. 영광에서는 군 단위에서는 최초로 314일에 일어났고, 영광읍에서만 3회의 시위 운동이 있었는데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 120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조철현(曺喆鉉), 영광공립보통학교 교사 이병영(李炳英),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 정헌모(鄭憲模허봉(許奉조술현(曺述鉉) 등이 함께 주도하였다. 영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출발, 도동리 남단(, 영광군청소년문화센터)을 돌아 영광경찰서로 향하던 중 남천리 조철현의 정미소 앞에서 경찰과 충돌,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었다. 이 만세운동을 지휘했던 분이 바로 영광대교회를 시무했던 "위계후(魏啓厚)" 조사였는데 고경진(高暻鎭)과 함께 고장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무지하고 몽매한 사람들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영광지역 3·1운동 당시 정신적 구심 역할을 한 위계후의 아호(雅號)는 해인(海人)이다. 위계후 조사는 친외가의 당숙인 고하 송진우와 창평 고직각의 사위인 인촌 김성수와도 교분을 맺어 서로 뜻을 같이하는 사이였다. 이를 계기로 영광에서의 항일운동을 당시의 기독인들이 주도해 갔다

또 영광대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어 고통당했던 김방호 목사와 편진옥, 노동악 등의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던 값진 교회이다. 특히 김방호 목사는 이후 교회를 사임하고 염산교회에서 시무하다 한국전쟁을 맞아 그의 가족과 함께 순교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교회가 불탔고 성도중 이광연 집사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폭도들에 의해 죽창과 몽둥이로 살해된 후 시체는 법성 앞바다에 버려지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순교자의 피와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는 노력이 지금의 영광대교회가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며 전국의 읍단위 교회로는 그 규모나 교세로 전국에서 제일 앞선 교회이다.

이제 영광대교회의 114년의 역사는 영광군이 갖게 되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다. 이는 기독교가 20세기 격동하는 시기에 민족의 아픔과 함께 지역민들에게 종교적 사랑으로 선교되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영광이라는 지역과 협력적 행위를 촉진시켜 기독교가 사회적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신뢰였고 규범이었고 네트워크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고 기독교의 속성상 영광 땅을 변화시킬 사랑의 원자탄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철진 광신대사회복지학과교수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