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주(영광읍 거주)

영광읍에서 함평 쪽으로 국도를 따라 11km 쯤 가다보면 길 오른쪽 공터 위에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일강 김철 선생 숭모비(一江金澈先生崇慕碑)’가 위치하고 그 오른쪽 2차선 지방도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독특한 건축양식의 상해임시정부 모형 건축물을 포함한 선생의 기념관이 나타난다.
숭모비 주소는 영광군 불갑면 기념관은 함평군 신광면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의외이고, 숭모비의 측면 하단 부분에는 1975년 8월 15일, 해방 30주년을 맞이하여 후손과 지역의 뜻있는 분들의 유지를 받들어 당시 영광군수와 함평군수가 찬조하여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후손인 기념관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당시는 관선 하의 영광군의 군세가 더 크다보니 영광군수의 지원금이 훨씬 많아서 영광군수의 이름을 함평군수 이름 앞에 새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나치는 작은 에피소드로 여기면서도 현 민선 지자체 하에서 지자체장이 관할지역을 벗어나 이러한 역사적인 행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지역행사에 집중하는 각 지자체를 보면서 씁쓸한 생각을 가져 보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4년을 기하여 1910년 한일합병 후 더욱 식민지 지배체제를 용이하게 하고자 이전 조선의 군현제도(郡縣制度)의 흔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지금의 ‘김철기념관’ 주소가 영광군에서 함평군으로 변경되었지만 그 자리는 고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영광군 관할이라서 오늘날에 와서도 양 군지역 사람들이 같은 정서를 공유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2006년 10월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도 선정된 선생은 조선의 국세가 기울어가는 구한말, 1886년 영광군 불갑면 함정리 609번지에서 부친 김동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하여 1908년 광흥중학교(현 영광향교 내 위치)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 1912년 서울의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다. 당시로서는 드문 신학문 전수에 국제적인 감각도 갖춘 엘리트라고 볼 수 있다.
1917년 구국의 일념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 1918년 8월, 신한청년당을 창당하고 동년 11월에는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 1919년 1월, 여운형, 김철, 김규식 등이 협의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고 또한 동월 국내에 밀입국하여 자신의 전답을 정리,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하여 동지들의 생활을 지원,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의정원 의원(전라도 대표) 및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으로 활동, 1932년 군무장(현 국방장관 격) 재임시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일황저격사건과 동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상해 홍구공원 일본인폭살의거를 당시 군무장으로서 김구 주석과 같이 주도, 1934년 6월 29일 국무원 비서장으로서 잦은 임시정부 이동에 따른 격무로 인해 급성폐렴으로 향년 48세로 중국 항주에서 운명하셨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함평군에서는 2003년 6월, 김철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출생지인 신광면 함정리(구 불갑면 함정리) 구봉마을 산자락 꽤 넓은 부지에 김철 선생의 사당과 동상 그리고 기념관, 수양관, 관리사 등을 건립하였다. 기념관 앞에 있는 선생의 동상은 왼손에는 외투를 걸치고 오른손은 들어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이며, 받침은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민 정신과 높은 뜻을 기리고자 국화인 무궁화를 새겼고, 기단석은 우리나라의 번영과 안녕이 만세까지 이어지길 기원하는 의미로 거북 두 마리를 조각하였다.
기념관에는 선생의 생전의 초상화, 유물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당시의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상황을 엿볼 수 있다. 기념관 옆에는 선생이 김구 선생 등과 함께 활동했던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중국 현지 건물과 똑같이 재현해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임시정부청사 내에 있는 책상, 침대, 다기, 주방 등 각종 소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이 모든 소품은 중국 현지에서 직접 제작하였다. 함평군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독립운동가 김철기념관은 청소년 호국보훈 현장학습은 물론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의의 교육장이 되고 있다.
주변에 산봉우리가 아홉개가 있다 하여 이름 붙은 구봉산 산자락에는 수령이 250여 년쯤으로 추정되는 소나무가 있다. 일명 ‘순절 소나무’ 또는 ‘단심송(丹心松)’으로 불리는데, 나무의 높이 13m 둘레가 1.5m나 된다. 이 소나무는 일강 김철 선생의 첫 번째 부인인 김정자(金貞子) 여사가 목을 매 순절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구전에 의하면 김철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김정자 여사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잠시 뿐, 1917년 조국 광복에 투신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부인에게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조국에 받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기막힌 부부의 이별이다. 당시 부인을 향한 일제의 감시가 점점 심해짐에 따라 부인은 ‘부군이신 선생께서 가족 걱정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서는 죽는 길 밖에 없다’라고 결심하고 이곳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 한다. 일명 사천댁으로 불렸으며 빼어난 미모를 지녔던 비련의 김해 김씨 김정자 여사! 김철 선생 후손들이 김여사 인척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후사를 보지 못하고 순절했기 때문에 찾지 못했다고 한다.
<유조선국 영산김씨세장비, 전남문화재자료 제142호>
1919년 1월, 3.1운동 직전 국내 잠입하여 불갑사 입구에 세운 비로 ‘이 땅은 조선의 강토이다’라는 무언의 강한 주장을 느낄 수 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과 함께 촬영한 선생의 사진과 선생이 1915년 노속을 해방시키고 1934년 중국 절강성 항주 광지병원에서 서거하는 장면까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일강 김철 선생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살펴 보면서 선생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자리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았고 주어진 역할에 대해 쉬움과 어려움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특히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든 활동인 독립자금 모금 운동에도 앞장섰으며 무장 항일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오로지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자세로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매진한 우국지사이시다.
그동안 선생은 그 업적에 비해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뒤늦게나마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후기) 근처 5km 쯤 떨어진 불갑면 쌍운리에는 정유재란시 일본에서 포로생활 중에도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일본 성리학의 비조로 추앙받는 수은 강항 선생을 모신 내산서원이 있다. 시대를 달리 하지만 항일의 두 선생이 내려 보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