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영광향리학회 회원

최근에 지인의 부탁으로 모처럼 용기내서 법성진성의 희미한 흔적들을 찾아 해설(?)할 기회가 있었다. 주로 법성포 역사문화 탐방길을 중심으로 약 3시간여 동안 답사하였는데,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이곳 법성포가 바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요즘에 지방 자치단체들이 도시 재생사업계획을 앞 다투고 있는데, 이리 좋은 자원을 영광군은 왜 이리 손을 놓고 있다 냐?”고 힐책했다. 해서 그렇지 않아도 지난 1월에 법성문화진흥원(원장 성시환)에서 영광군에 사업의 필요성을 진달하여 머지않아 이 사업이 본 괘도에 오를 것이라고 얼버무렸었다. 그 후 이 사업은 법성면장과 영광군 관계관들의 지대한 관심으로 현지 조사를 하는 등, 머지않아 본 괘도에 오를 듯하다. 또 하나, 이낙연 총리의 국회의원 재임시절 공약사항이자 영광군 숙원 사업인 법성진성복원사업이 얼마 전에 전남도의 심의를 거쳐 현재 문화재청의 사적지정 심의 절차 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의 법성지역은 지금부터 천여 젼 부터 국가재정의 중추기관인 조창이 자리하였고, 국방의 요새였기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추어 이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은 당위성으로 최근에 법성문화진흥원에서는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늘어나는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주민역량을 함양하기 위하여 법성포 역사문화 탐방길안내 책자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책 발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이 탐방길의 일부인 '법성포'에 남아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한양기생 '내산월'

국내 최초로 난중일기를 완역한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의기(義妓)제하의 글에서 “(전략) 159698일 이순신은 .... (중략) ... 아침을 먹은 뒤 길에 올랐는데 감목관과 영광군수(김상준)을 만나고 ... (중략)... 3일 뒤 이순신은 영광에 갔다. .... (중략) ... 이때 영암(필자 주:영광의 오기다.) 에 머물고 있는 한양 기생 내산월이 와서 만났는데 밤이 깊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 하다가 헤어졌다. 이 내용이 난중일기에 나오는데 여기서 내산월이라는 인물은 2004년에 필자가 처음으로 발견했다. ..(중략) ... '내산월'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문헌에서 확인되었다. 이춘원(1571~1634)구원집에 보면 한양기생 '내산월'에게 준 시(贈洛妓萊山月)가 있다. ‘스스로 예쁜 것만 믿다가 홍등가에 잘못 들었는데, 천애의 땅에서 영락할 줄 어찌 알았으랴(豈知零落在天涯). 번화한 거리에서 한 번 더럽혀지고, 바닷가 꽃 속에서 부질없이 풍월 읊네(風月空隨海上花). 한 가득한 오주(필자 주: 영광의 별칭)에서는 봄풀이 푸르고 꿈 깨는 금곡에서는 석양빛 가득하네. 아름다운 얼굴 빌려오지 못하고 나이만 들었으니 붉은 촛불과 맑은 술잔 그대 어이 하리오.’ 이 시에서 천애(天涯)와 해상(海上)은 그 당시 '내산월'이 머문 영암(필자 주:영광의 오기다.)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위 시에서 천애(天涯)'"해상(海上)’은 그 당시 '내산월'이 머문 영암(필자 주:영광의 오기다.)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구원 이춘원은 선조 29(1596)에 유람 차 영광에 들려 당시 군수였던 김상준(재임기간 1595. 6~1597. 8)을 만난다. 이때 법성포에서 강항이 동석하여 이춘원을 위해 연회를 열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바다와 호수가 완연한 봄날에, 한양사람 이곳 사람 함께 배를 탔다네. 밀려나는 물결이 우릴 따르고 소나기처럼 물살이 내달음치네. 어여쁜 기녀가 금빛 술잔 올리고 ... ” 이 시의 '어여쁜 기녀''내산월'로 보이며 이 추리가 맞는다면 이춘원이 '내산월'에게 준, 앞 시와 강항의 시에 차운한 시의 배경은 때와 장소가 같은 법성포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영광군 산천 조에는 "법성포는 강산이 수려하여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중국의 '동정호에 견주어 작은 동정호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이춘원이 남긴 시의 무대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노닐었던 매바위 앞 해변으로 추정된다. 허균이 남긴 성소부부고18권 조관기행에는 내산월은 낙빈선(기생)과 함께 법성포에 우거하며 관아의 연회에 참석하여 관원들에게 술을 따르고 금가(琴歌)를 들려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노승석 소장의 글을 따라가 보자. “구전설화에 의하면 내산월이 평소 흠모하던 이순신에게 몇 차례 편지로 만나기를 청하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는 한양에서 지내다가 중년 이후에는 영암(필자 주:영광의 오기다.) 법성포에 살았고,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 때 많은 금괴를 바쳤다고 한다.난중일기기록을 볼 때 이순신이 영암(필자 주: 영광의 오기다.)에서 내산월을 만난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내산월이 그 당시 기생의 신분이긴 했으나 전쟁에 도움을 준 점에서 남다른 의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시미 '일옹대'

법성향지에는 노승석 소장이 소개한 내산월이라는 의기의 행적과 유사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매바위에서 구시미 마을로 가는 중간 지역 도로변에 원불교에서최일양대의 묘라 고 새겨진 안내 표지석이 있다. 원래 일옹대(一翁待)’로 전래되고 있는 이 기녀에 최씨 성을 붙인 점으로 미루어 그동안 구시미 최씨 문중에서 4백여 년 동안 이 묘를 돌보고 관리한듯하다. 법성향지'일옹대'는 전설 속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노승석 소장이 소개한 내산월은 실존 인물로 보인다. 두 사람은 모두 기생신분이고, 활동무대가 법성포였으며, 좋은 일을 많이 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현존하는 구시미의 '일옹대'의 묘가 혹 한양기생 '내산월'이 아닐까? 한양기생 '내산월'의 일생을 픽션화하여 구시미 '일옹대'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설로 이어온 것은 아닌지, 자꾸 의구심이 든다. 기타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행적은 이충무공 전서 제8권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우리 고을은 법성포단오제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승화시킨 고장이다. ‘법성진성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귀중한 고을자산이 될 수 있도록 민관이 지혜를 모아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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