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초은/ 해룡고등학교 1학년

<제12회 평화통일염원 글쓰기 공모전 전체대상>

"옛날 어느 옛날에, 깊은 절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두 마을을 이어주는 유일한 외나무다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여우와 늑대가 양쪽에서 동시에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 먼저 지나가고 싶어 상대가 비켜줄 때 까지 아무도 먼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고 매번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외나무다리 위에서 마주친 둘은 격한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낡은 외나무다리가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외나무다리는 깊고 깊은 절벽 아래, 어두운 암흑 속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가까스로 그 다리에서 뛰쳐나온 여우와 늑대는 걸음아 도망갔습니다. 결국 그 두 마을은 유일하게 이어주던 다리가 부서지면서 영원히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동물들은 이동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분리된 양쪽 마을에 사는 모든 동물들은 절벽을 사이에 두고 저 멀리 가족과 친구의 이름만 목놓아 불렀습니다. 그 중에는 잠깐 놀러왔다가 되돌아가 가지 못하는 동물들도 있었고 부모님과 떨어진 동물들도 있었습니다."

할머니 밑에서 큰 나는 매일 밤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며 자곤 했다. 할머니의 특유의 정겹고 따뜻한 냄새를 맡으며 잠에 들었다. 가끔 할머니께서 내게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 주셨는데 나는 그게 좋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바로 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여우와 늑대처럼 싸우면 안 되겠구나 라고 다짐하곤 했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할머니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하실 때면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목에 뜨거운 응어리가 있는 듯한 답답하고 슬픈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 이상하고 울렁거리는 마음이 할머니를 통해 내 마음속으로 전달되는 듯 했다.

시간이 흐르고 초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 나는 할머니와 이별하고 도시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할머니가 그리웠지만 나는 곧 새 환경에 적응하고 학교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첫 사회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리엔테이션으로 가볍게 자기소개를 시키고 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분단된 우리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단이 된 배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과 북한의 소련이 서로 다른 남한과 북한의 통치이념을 중심으로 하여 싸우다가 결국은 휴전을 하게 되었고 지금이 그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인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언제든지 싸움을 시작하고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상태였다는 사실은 이번 사회 시간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정말 놀랍고 두려웠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집에 가서 엄마께 들려드렸다. 그랬더니 엄마가 외할머니께서도 어렸을 때 분단을 겪으셨다고 하셨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북한에서 살다가 분단이 되려 하니 부모님, 즉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와 남한으로 내려오려 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복잡한 인파에 휩쓸려 증조할아버지와 헤어져 남한에서 증조할머니와만 살았다는 것 까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항상 밝고 바르고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는 할머니께서 사실 그런 힘든 일을 겪으셨다는 것이 놀라웠고 안쓰럽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그제서야 할머니가 어렸을 때 들려주시던 이야기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바로 분단을 겪으신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분단의 아픔과 이산가족의 고통을 이야기해준 것 이다. 늑대와 여우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싸우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다 분단을 초래한 사람들이고 그런 둘의 싸움으로 다리가 부서져 피해를 본 다른 동물들은 바로 우리 할머니와 같은 피해자와 이산가족일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할머니께서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내가 느꼈던 그 이상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며 분단의 아픈 기억을 말하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어 다른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와 처음으로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 힘들고 불안했다. 주말마다 집에 가는데도 불구하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항상 집을 떠나 오는 월요일이 끔찍하고 싫었다. 가족을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께서는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나는 고작 그것 하나 못 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티비에서 봤는데 헤어진 이산가족들을 위해 남북한 간의 이산가족 상봉을 주최하기도 했다. 서로 자신의 가족을 애타게 부르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뜨거운 불에 데인듯 아팠다. 그러나 더 슬픈 것은 그 이산가족들 중의 대부분이 나이가 많아 돌아가셔서 만날 수 없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일부에 따르면 남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이 약 767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90년부터 따지면 이산가족 상봉을 한 사건은 360여건 정도라고 한다. 아직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이번에 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남북정상회담을 주최하기도 했다. 그는 427일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하였다. 11년 만에 성사된 3번째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공동 발표하였다. 이 선언을 통해 핵 없는 한반도 실현, 연내 종전 선언,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성 설치, 이산가족 상봉 등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남북통일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간다면 꼭 통일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201825, 할머니께서는 그토록 바라던 남북한의 통일을 보지 못하시고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나는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것은 할머니를 더 이상 못 본다는 절망감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하늘에서 할머니의 가족을 모두 만나고 행복해 할 것을 생각하니 기뻐서,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하늘나라는 분단선이 없으니까.

나는 통일을 못다 보고 가신 할머니를 위해서 이곳에 남아 할머니가 끝내 못 보고 가신 남북한의 통일을 두 눈으로 꼭 보고 할머니께 전해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어서 누군가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내 자식을 낳게 된다면 내 자식에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그렇게 그 두 곳은 영원히 갈라져 서로를 애타게 불렀습니다.'라는 결말이 아니라, '동물들은 힘을 합쳐 더 튼튼하고 큰 다리를 만들었고 다시 만난 동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 동물들은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라는 행복한 결말을 얘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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