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서기 2,000, 한 세기가 가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첫 해였다.

그렇게 찾아온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해를 맞이한 영광에서의 우리에게도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 였다.

조운 시인이 탄생한 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칠산문학회를 중심으로 지역 원로들과 출향인사들이 뜻을 모아 ''조운문학 기념사업회(회장:나두종)''를 결성하고 전국의 문학단체(민족문학 작가회의:현재의 작가회의 전신)등과 협럭하여 ''조운 탄생 백주년 기념 행사''를 치렀다.

전국 청소년 백일장을 비롯해 시비 건립, 학술세미나, 시회전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행사였다.

우리 영광출신 고 송영 소설가를 비롯해 조운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장순하, 이근배, 한춘섭 시조시인들과 전북 전주의 정양 시인 등 전국에서 많은 원로 중견 작가들이 함께 했다. 필자의 초청으로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던 천승세 소설가도 참석함으로써 천승세 님은 이후 얼마동안이라도 영광에서 머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어느 해 끝자락, 작품 창작을 위해 영광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천승세 님을 찾아서 광주의 젊은 시인들이 송년 인사차 영광으로 왔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회색 빛 저녁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저녁무렵 우리는 영광 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화개자터''라는 실내 포장마차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이미 귀향을 해서 영광에 거주하고 계시던 정종 박사님도 함께 했다.

당시 정종 박사님의 연세는 88세였고 천승세 님은

70대 초중반이었다. 실명으로 인해 활자를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종 박사님은 타오르는 향학열을 억누를 수 없어 카세트 녹음 테잎을 통해 세계 소설 문학을 재독, 삼독 하며 재해석을 하고 있는 때였다.

따끈한 국수와 간단한 몇가지 음식 그리고 진지한 문학 이야기를 안주 삼아 문단의 원로 두 분과 제자 세대인 젊은 작가들이 함께 한 자리, 술잔이 몇 순배 나 돌았는지?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자리를 마무리 하고 모두가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천선생 이 거 받아 많이 못 담아서 미안해, 구겨진 천원짜리가 생길 때마다 쓰지 않고 다리미질을 해서 한 장 한 장 모은 거구만'' 봉투 속에는 그렇게 해서 모은 천원짜리 지폐가 100장이 들어 있었다.

자리를 파한 뒤 정종 박사님은 댁으로 가시고 천승세 님과 필자는 광주에서 온 작가들과 함께 함평군 함평만 바닷가의 주포에 있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울 나그네의 기분으로 난로가에 둘러앉아 따뜻한 겨울 저녁의 온기를 나누어 마시는 시간. 낮고 묵직하게 목메인 음성으로 천승세님이 한 마디 하셨다.

''내가 박사님께 용돈을 드려야 도리인데 오히려 내가 용돈을 받았구나. 이 귀한 돈을 나 혼자 쓸 수 없으니 오늘 찻값은 내가 내마''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정종박사님이나 송영 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나의 혼은 그 때의 눈물 나게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풍경들을 떠올리며 먼 과거의 기억 속을 원유( 遠流)하고 있다.

지난 해 말 출간 된 윤석진 시인의 첫 시집 ''내 시간의 풍경'' 에 실린 ''간혹, 떠오르는 풍경''이란 작품을 통해서.

어느 해 세밑, 서해 바닷가 소읍, 조촐한 송년회에서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철학자와 희수(

喜壽)의 소설가가 만났다. 자리가 파할무렵, 거의 시력을 잃어 활자를 볼 수 없다는, 그래도 공부는 그만둘 수가 없어 매일 열시간 넘게 이독(耳讀)을 한다는 철학자는 소설가를 옆자리로 불러 남몰래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먹물처럼 적막한 바닷가 찻집, 흐릿한 불빛 속에서 봉투를 꺼내놓으며 소설가는 음울한 얼굴을 지었다. 용돈을 드려도 모자란데 되레 용돈을 받았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지폐, 다림질 하여 반듯하게 편 천 원짜리 백장이었다. 기어코 소설가는 새파란 후배들의 찻값을 냈다. 귀한 돈을 나 혼자 쓸 수는 없다. 윤석진 시 간혹, 떠오르는 풍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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