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3년 전 이곳으로 귀촌할 당시 약속 장소인 면소재지를 찾느라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기본적인 생활기반시설이 거의 없고 그 흔한 간판조차 찾기 어려웠다. “묘량면이 영광군 11개읍면 중에서 가장 낙후되었다”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게 아니다. 물론 그 당시 개인적으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달리 보면 묘량면은 예전 방식의 ‘개발’이 덜 이뤄진 곳이고 나는 도시의 아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농촌에만 있는 그것’ 때문에 시골 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여민동락공동체는 묘량면 소재지에 있는데 사무실 앞쪽을 바라보면 잘 정비된 쌀 단지가 뒤쪽 산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로 연결되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출렁이는 초록색과 노란색 물결, 가끔씩 비온 뒤 무지개가 이 배경에서 시작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글 솜씨가 젬병인 나도 시인이 되고, 모든 세상만사를 포용할 것 같은 보살이 된다. 매년 여민동락을 방문하는 많은 외지인들도 이 풍경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고향의 포근함과 따뜻함”, “왠지 모를 마음의 여유와 힐링” 같은 느낌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같은 농촌이라도 산과 계곡이 많은 지역에서 오는 분들은 그곳에서 볼 수 없는 이 풍경의 매력에 푹 빠지곤 한다. 이렇듯 산업화시절 가난과 후짐의 대명사로 누구나 탈출하고 싶었던 농촌이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되돌아가고 싶은 안식처이자 새로운 삶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최근 들어 오랫동안 유지해온 국가 주도의 개발정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다양한 지면과 뉴스를 통해 자주 들려온다. 도시화와 산업화, 그로 인해 황폐화된 농촌을 살리겠다고 시작한 ‘외생적 개발’을 재고하고 근본부터 다시 살펴보자는 이야기다. 성장동력과 주체를 외부에서 찾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농지와 산을 갈아엎어 산업기반 조성과 대규모 관광지 개발을 추진했지만 농촌 주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고 도시로의 탈출 행렬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물론 외부 자본과 공장이나 관광지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과정에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의 주체성과 역량이 발휘되고 지역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과 공무원, 정치인들이 ‘선진지 견학’이라는 명목으로 찾는 해외의 사례도 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현장에서 이뤄지는 많은 일들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둔감하다. 민관 모두가 절박한 듯 이야기하는 인구감소와 과소화, 고령화라는 화두가 연일 다양한 지면에 올라오지만 현장은 관행과 변화에 대한 불편함들로 과거 방식과 틀에서 한 발짝 전진하는 것도 어렵다. 결국 위기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것은 다수의 농민들이고 함께 사는 일반 주민들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가 딱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다행히 묘량면은 3년 전부터 자발적으로 주민들과 행정이 합심하여 ‘묘량면 지역 활성화 위원회’를 만들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묘량면의 낙후성을 극복하고자 ‘주민들이 만드는 10년의 계획과 실행, 더불어 행복한 묘량, 지속가능한 묘량’이라는 비전을 세운 뒤 1차 전략목표로 빈약한 묘량면의 생활기반시설을 구축하기 위한 농림축산식품부의 기초생활거점육성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이 3년의 과정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업부지 확보였다. 묘량면소재지 주변은 거의 대부분이 농업진흥지역이다. 우리는 사업추진을 위해 소재지 중심 도로에 붙어있던 4마지기 정도의 논을 알아봤지만 농업진흥지역인 이곳엔 근린생활시설을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 농지법을 근거로 한 허가 담당자의 결론이었다. 이 사업 목적이 농민과 주민들을 위한 생활기반시설 구축이기에 법령의 허술함과 담당자의 경직성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농업진흥지역이 가지는 근본 취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어지는 전국의 수많은 오남용 사례를 알게 되면서 그대로 존중하고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난감한 일이 하나 생겼다. 위에서 언급한 쌀 단지로 옆면의 산업단지까지 연결할 신설도로가 개설된다는 주민설명회가 열린 것이다. 도로 신설의 주된 이유는 산업단지와 인근 광주광역시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연결해 산업단지의 접근성을 높이고 물류비용 절감과 산단 종사자들의 출퇴근 교통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묘량면의 여건이 매우 열악함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과거의 개발방식에서 한 발짝 비껴 서있으면서 그나마 간직해온 ‘농촌다움’이 묘량의 현실에선 축복인지 모른다고 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지역 입장에서 기존의 것을 뒤엎고 가는 것보단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의 구상 속에 불쑥 들어온 이 신설도로는 우리의 구상을 흩트려 놓았다. ‘어떻게 접근해야 오랫동안 준비해온 행정, 갈라선 마을이 덜 상처받고 묘량이 다시 한 번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수십 년간 농민들이 유지 관리해 온 쌀 단지 수십마지기의 유무형 가치’가 ‘신설도로를 통해 얻는 물류비용 절감과 산단 종사자들의 편의성’보다 영광에 이롭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농민들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생활기반시설 구축은 농업진흥지역 보존 가치를 넘을 수 없는데, 산단을 위한 ‘신설도로’는 농업진흥지역 보존 가치를 뛰어넘는 이런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설명할까! 정말 이 복잡할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머릿속이 답답한 지경이다.
예를 든 위의 내용은 비단 우리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국의 농촌에서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현실 중에 하나 일 뿐이다.
요즘 위기에 처한 농업, 농촌을 극복하기 위해 각기 다양한 부처에서 각종 위원회를 만들고 주민들 중 분야별 전문가들을 위원으로 위촉한 뒤 회의를 개최하곤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위원회가 요식행위인 경우가 많다. 당사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계획적으로 듣고 모아내는 과정은 언감생심이다. 1년 한 두 차례 모여 행정과 무슨 연구원이 만든 자료를 보여주는 의견을 듣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 자리에서 몇 마디 거들어봤자 반영될 리 만무하다.
무슨 포럼이니 세미나니 00연구원의 종합발전계획을 들으러 가보면 마음만 상할 뿐이다. 온통 비슷한 내용들뿐인데 제일 중요한 내용이 빠져있다. 주민들이 지역사회의 주인으로 참여하여 의견을 모아내고 반영하는 절차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결국 무슨 박사와 교수, 고위공무원들의 그럴듯한 성찬은 현장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일제 식민지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폐허가 된 한국을 이만큼 성장시킨 동력을 백번 양보해서 “국가가 주도하고 말단의 강력한 행정력에 있다”고 인정한다 쳐도 너무 한 것 아닌가 싶다. 지방자치 30년, 문재인 정부의 ‘자치분권’이 나오는 2020년이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싶다.
인구감소와 과소화, 고령화는 수십 년간 축적된 국가정책의 산물이다. 수십조를 쏟아 부은들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 당연히 행정의 시간표와 성과지표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앞 선 역사적 위기 속에서의 주민들의 경험을, 현재 신자유주의의 엄혹한 현실을 돌파하는 주민들의 힘을 더 이상 유보시켜선 안 된다. 지자체가 우선순위로 둔 ‘인구감소와 과소화, 고령화’ 해법의 상수로 올려놓을 시기가 되었다.
앞으로 10년이다.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은 농업, 농촌의 현실과 각종 지표를 봤을 때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각 읍면의 색깔과 정체성을 기반으로 그 지역주체들의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곳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주민들의 지혜를 모으고 협동과 연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자체가 공론 장을 열어주면 좋겠다. 실제로 작동하는 민관 거버넌스가 존재하고 행정이 협력한다면 결국 그곳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농촌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는, 정말로 인식의 전환과 변화된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