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물때가 지난 것일까?

후딱 비워버린 술잔처럼

그렇게 후련하게 등 돌리며

아득하게 멀어진 그대 하얀 손수건

 

오지랖 넓은 여인으로 태어나

약속으로 바라보다 망부석이 된 갯벌,

미동도 없이 실신한 목선 두 척,

빨간 신호등에 멈춰선 한 점 바람,

정적을 가위질하는 바닷새

지금은 서해안 음력 스무 닷새 그리고 한낮.

수묵 빛 바위에 일상에 지친 어깨를 눕힌다.

쪽빛 하늘 둔덕엔 열두 발 상모 휘돌아 치며 흐르고

수궁 저 발치에선 징 소리 윙윙 흩어지며

망각 속에 잠든 수초들의 주문을 풀기 시작하는데 ....

 

간밤 머리맡에 와

부질없이 눈물 나는 사연 주절대다

가슴에 안겨 울고 간 파도는 차라리 잊자.

억년 세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저 침묵의 바다처럼.

-임숙희 시 썰물전문-

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썰물은 문명의 이기에 저당 잡힌 현대인들의 지친 영혼을 맑고 깨끗한 원초적 그리움의 세계로 인도해준다. 어쩌면 숙명적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이별의 대상이 오히려 절망의 끝에서 재창출되는 새 희망이요 아름답고 고귀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승화되고 있다.

무섭도록 외롭고 적막하기만 한 바닷가라는 공간 속에서 詩人은 한 마리 새의 울음을 통해 그 미칠 것 같은 고요를 깨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으리라. 때문에 새로 하여금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복 바쳐 올라오는 설움을 울음 울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울음을 새의 울음으로 대치시켜 토해내게 함으로써 자신은 단장(斷腸)의 속울음을 삼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절망에 울던 여인은 이제 기다림에 지친 육신과 영혼을 그 절망의 끝에 눕힌다. 그리고 고요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닷속 저 깊은 곳의 울림을 통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또 절규한다.

잊자, 이대로 잊어버리자. “간밤 머리맡에 와 부질없이 눈물 나는 사연 주절대다 가슴에 안겨 울고 간 파도는 차라리 잊어버리자. - 그러나 어찌 잊힐 수 있을 것인가? 그 허망한 약속을 이제는 잊어버리자고 시인은 넋두리처럼 반복하지만 이는 대단한 파라독스다. “억년 세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저 침묵의 바다처럼영원히 잊을 수 없음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는것이다.

이 시를 단계적으로 살펴보면 제 1연에서는 제목인 썰물을 한 잔의 술에 비유해서 누군가 그 술잔을 후딱 비워버린 행위로 이별의 시작을 구체화 시키면서 다소의 원망조차 내재 되어있음을 암시하며 썰물처럼 떠나버린 이별의 주체인 그대(그리움의 대상)가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어지는 2연에서는 떠나버린 자에 대한 그리움, 절망, 연민의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제5정적을 가위질하는 바닷새라는 표현은 시 적 화자의 격앙된 감정을 고도로 압축시킨 절제 된 표현으로써 이는 시인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감정 표현의 극치이며, 시를 통해서만 그 표현이 가능한 언어예술의 최대 미학적 활용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감정이 고조되었던 2연과는 달리 3연에서는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이성적 고찰을 통해 감정을 통제해나가고 있다. 시인은 이성의 눈과 귀를 열고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4연에서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통한 깨달음에 의해 절망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데 그 깨달음이란 [이별의 주체가 절망의 나락(那落)이 아닌 새 희망의 등불로써 승화되고 있음]이다. 그래서 그 이별의 주체를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간직하는 것이 오히려 영원히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알고 시인은 잊자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을 암시하며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하나의 약속을 가슴에 새겨두고 떠나버린 그대(이별의 주체)를 기다리며 망부석이 된 갯벌로 표현된 시인의 썰물”(그리움의 대상)은 무엇일까?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서 부질없이 눈물 나는 사연 주절대다 가슴에 안겨 울고 간시인의 파도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시인을 울게 하고 절망하게 하였을까?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있어서 그 대상은 마음대로 설정되어도 별 무리가 없다. 이 점이 이 시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 기다림의 대상이란 독자에 따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연인일 수도 있고, 마음으로부터 간구하는 종교적 절대자일 수도 있고, 고뇌하는 철학도의 이상향일 수도 있으며, 혼자만이 간직하고픈 젊은 날 추억 속의 주인공이거나 우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이냐? 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들의 생에 있어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 하나쯤 간직할 줄 아는 자야말로 아름다운 영혼을 소유할 수 있고 또 발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을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그 대상으로 인해 깊이 절망하는 자만이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시인의 윤기 나는 삶의 자세에 독자들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시인의 그리움에 대한 집착도 이쯤 되면 이는 단순한 낭만적 감상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삶 속의 원초적 숙명으로까지 발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그리움이란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닐진대 우리도 각박한 생의 한 가운데에서 저 끝없는 출렁임 속 칠산바다의 썰물같은 그리움의 대상 하나쯤 간직하고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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