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곽일순 사진가·수필가 

최근 한 스님의 이야기가 식사자리에서 찬이 되고 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스님이다. 활동을 많이 한 관계로 웬만큼 알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존재감을 알린 것은 그의 저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흔한 생활지침서지만 유명한 스님이 마음공부를 위해 썼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며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책이다. 하지만 내용은 의외로 평범하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행하지 못하는 부류의 극히 뻔한 글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최근 행동에서 오는 느낌은 아니다. 몇 년 전에 지인이 선물로 건네준 책이 이 책이었고 앞의 몇 쪽을 읽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덮었다. 깊이 없고 진실성이 없는, 상업적 냄새가 가득한 일반 감성 책팔이들의 글과 전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명 스님이 썼다는 것만 달랐고 이는 충분히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같은 말도 의사가 하면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고 유명 종교인이 하면 깊은 진리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종교팔이다. 지상파 방송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유명 목사도 같은 부류다. 입으로 예수를 팔아 뒤로는 부를 축적하고 있다. 그래서 부동산 목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에게 과연 예수의 참 가르침이 있기나 한 것일까. 예수가 가난한 사람과 아픈 사람 그리고 최 하위층을 위해 어떻게 살다 갔으며 자신을 희생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침 튀기는 더러운 입으로 그를 팔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종교계는 이러한 사람들의 부를 향한 지향점을 향해 같이 흘러가고 있다.

기독교에도 참다운 목사가 있고 불교계에도 진실한 스님은 있다. 다만 이들이 외치는 진리의 소리는 매우 미약하다. 대세가 아닌 까닭이다. 현실에서 소위 보수 성향을 띠는 사람들의 무리는 정해져 있다. ‘이라는 의미를 붙이면 된다. 대형교회, 대재벌, 거물 정치인, 큰스님 등이 그렇다. 이른바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대로가 좋다. 세상과 사회가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기득권은 보수가 된다. 이들에게 절대 부족한 것은 타협과 소통이다. 이렇게 지키는 욕심의 빗장을 좋은 말로 표현해 보수라고 하지만 엄격한 의미의 보수와는 결이 다르다.

우리는 긴 세월을 불교의 영향력 아래 살아왔다. 고구려는 스님 순도가(順道肇麗), 백제는 마라난타가(難陀闢濟), 신라는 아도 스님이(阿道基羅) 각각 전했다. 가장 빠른 고구려가 372(소수림왕 2)이니 16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 종교관은 물론 문화까지 거의 장악했던 셈이다. 그 기세는 아직 진행형이고 그만큼 종교팔이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으로 하는 마음공부와 수행이다. 사람과 공부가 다르니 행동이 입을 따라가지 못한다. 나와 한 시대를 같이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두근거리는 사람이 있다. 성철 스님이다. 그는 지눌 이래 가장 큰 스님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93114일 아침 7시 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불교계는 큰 기둥이 빠졌다. 그는 깨우침을 얻고도 평생 누더기 장삼을 입고 정진했다. 깨우침을 얻고도 정진을 계속함을 그는 나 같은 중이 우리나라에도 한 명쯤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성철 스님은 8년을 눈을 붙이지 않으며 몸으로 실행했다. 이들을 팔아 축재를 하는 요즘 쓰레기 종교인들이 더욱 미운 까닭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법정 스님은 무소유라는 책을 통해 방하착(放下著)의 의미를 되새김질 시켰다. 법정은 정찬주(無染/법정이 지어줌) 작가의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성철 일대기를 기록한 책의 서문에 나는 아직도 (스님이) 챙겨준 무명옷을 기워가며 잘 입고 있다.”고 했다. 헤진 무명옷은 그 이상의 가르침이기에 의미가 깊다. 혜민이 말하는 무소유와 법정이 말하는 무소유에는 큰 괴리감이 존재한다. 기워 입은 무명 장삼과 비단 장삼의 차이 만큼이다. 이따금 만나는 스님이 중 동네도 사람 사는 곳이라 마찬가지라며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중 노릇은 왜 하며 목사 노릇은 왜 하는 것일까. 종교인은 사회적인 모범이 되어야할 의무와 사명이 있기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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