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사진가·수필가
한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는 시간은 언제나 각별하다. 일상의 시간이 아닌 뭔가 의미를 부여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전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요즘 세태가 그렇다. 특별히 법 지식이 없는 입장에서 겪는 최근의 정치권 혹은 사법권의 다툼은 혼란스럽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관행과 같은 체제가 갑자기 지상으로 튀어나오고 권력의 형태로 몇 가닥 나뉘어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다. 인심은 따라서 부침을 반복하고 어지러운 미디어의 요동만큼 시민의 판단도 혼란스럽다. 코로나19로 출발한 한해가 정치권까지 합세해 우울한 국민의 상태를 최악으로 몰아붙이는 형국이다. 이렇게 올 한해는 마무리가 되고 있지만 공방으로 허비한 국력은 보충이 어렵다.
연말이면 항상 관심을 끄는 것이 소위 올해의 ‘사자성어’다. 이번에는 내로남불을 한문화한 ‘아시타비(我是他非)’가 선정되었다. 한자의 뜻대로 나만 옳고 타인은 그르다는 의미다. 처음 대하는 성어다. 아마도 현실에 대비해서 만들어낸 신조어일 것이다.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이러한 현상은 만연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불편한 것은 시국을 대변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지성인을 대표한다는 교수님들이 선택한 성어다. 시대를 꼬집는 촌철살인의 집약이 올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라면 과연 현재 대한민국의 교수들이 자격이 있을까. 비뚤어진 사회적 정의와 온통 꼬여가는 정국의 혼란을 방관만 하는 지성인이라면 이미 자격상실이다. 무슨 염치로 세태를 꼬집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실천이 없는 목사의 설교는 밥벌이 직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행동이 없는 학자의 지식 역시 호구지책에 불과하다. 지식팔이가 국민에게 무슨 감동을 주겠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현실에 영합하는 지식인들이라면 쥐 죽은 듯이 입이라도 닫고 있는 것이 옳다. 본인들이 아시타비의 대상이다.
요즘 형국을 보면서 떠올리는 사자성어는 오히려 염량세태(炎涼世態)다. 사전적 의미는 “세력이 있을 때는 아첨하며 따르고 세력이 없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상인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고대부터 변치 않는 정치권의 진리다. 그래서 세력의 규합은 치국의 기본이었고 필수적인 기반이었다. 과거 삼김(三金)시대의 가신정치가 그랬고 군부정치의 ‘하나회’ 등이 그랬다. 요즘은 ‘친박’ 혹은 ‘친문’ 등으로 나타나지만 넓게는 정치세력의 규합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장 뼈아픔은 바로 세력의 부재였다. 친박 혹은 친문을 나쁘게만 평할 필요는 없다. 정치는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행하는 단일지향점의 집단행동이다. 그래서 정치는 유사이래 세력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세력의 지향점이 사회적 정의를 벗어나면 요즘 검찰과 사법권과 같은 진영을 갖추게 된다. 바탕에 국가 혹은 국민의 이권이 아닌 집단의 이권을 배치하면 언제든지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국민이 선출한 국민의 대표 위에 군림하는 세력은 위험하다. 이들에겐 삼권분립이 통하지 않는다.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재가한 사항 역시 판사가 간단히 뒤집는 현상이 현실이 된다.
국민은 현재 여당에게 견제를 위한 큰 세력을 주었다. 행정부의 대통령을 주었고 거대한 입법부를 주었다. 하지만 국민이 부여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모습에 지지자는 하루가 다르게 이탈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당 대표와 총리 그리고 국회의장은 협치와 신중을 내세우며 뒤로 빠지고 혼자 치열하게 싸우던 여성 장관은 상처를 안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비겁’이라고 한다. 국민이 부여한 세력을 비겁으로 갚고 있는 모습이 너무 흉하다. 초선의원들이 거대한 사법권 앞에 당랑거철의 기개로 맞서고 있지만 도울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지 사명은 아닌 모양이다. 더 이상 비겁하고 추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민이 준 세력을 쓰지 않으면 배신이요 직무유기다. 망나니처럼 휘두르는 수사와 무차별 압색이 두려운 자는 정치권을 떠남이 맞다. 그러한 사명감도 없이 정치의 사명을 떠안을 수는 없다. 초선의원들 뒤에 숨어 눈치를 살피는 의원들이 누구인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