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여민동락공동체 살림꾼

폭설과 한파가 마을을 휩쓸었다. 주간보호센터가 사흘 연속 문을 열지 못했다. 도로가 얼어붙고 마을이 고립되었다. 하얀 눈에 뒤덮여 시간이 정지한 듯한 마을은 '잔혹동화' 같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반짝이지만 외롭다. 시골의 홀몸 어르신들에게 폭설, 한파, 폭염, 태풍과 같은 날씨는 그 자체로 위협이다. 주간보호센터에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자립생활 불능으로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은 매우 곤란해진다.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을 받기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추억 속 시골 동네 풍경은 옆집 숟가락 갯수가 몇 개인지 알 정도로 가깝고도 친밀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빈집은 늘어나고 농촌 시골은 점점 더 '과소화'되고 있다. '과밀화'의 반대말인 '과소화'는 인간이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기반시설과 사회적 인프라가 붕괴 지경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과소화는 사람들간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고립과 단절, 관계망의 해체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악화와 삶의 질 하락으로 이어진다. 도시라고 다를까? 사람과 자원이 집중된 도시는 '과밀화'의 역습을 당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감염병의 손쉬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쪽방촌의 비극, 생계 비관 자살, 고독사 등이 보여주듯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여 있으나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축적이 쌓아 올린 거대한 도시 문명의 디스토피아 안에서 각자 외로운 섬으로 존재한다. 각기 다른 양상이지만 도시와 농촌 모두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공동체의 붕괴는 취약계층의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친다. 노동시장의 주변에 존재하거나 복지를 '구매'할 수조차 없는 이들은 더 많은 사회적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꿈꾸며 스스로 살아나갈 힘을 줄 수 있을까?

영국의 사회학자 힐러리 코텀은 책 <래디컬 헬프>에서 돌봄과 복지 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복지 시스템은 필요와 위기 수준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복지 대상자들을 관리할 뿐이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복지 급여와 서비스 체계도 복잡해진다. 한국에서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서비스의 종류는 360여 가지가 넘는다. 행정부처별로 나뉘어져 서로 통합되지 않는 데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도 그 내용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다. 큰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에 비해 안전망은 여전히 허술하다. 삶의 벼랑 끝에서 그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간 이들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복지 시스템을 손본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그다지 바뀌는 것은 없다.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키워드는 '연결'이다. 개인, 가족, 지역 사회가 배우고 일하고 건강하게 서로 맞닿으며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한 지원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새로운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과학기술과 복지제도가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는 했으나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복지는 행복한 삶을 창출하기 위한 역량을 키울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관리와 통제의 복지에서 역량 중심의 복지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연결을 회복하고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필요한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사람과 자원이 유연하게 연결되고 지지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관료적인 복지 행정 시스템의 차원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사람에 주목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데 집중하려면 권한이 지역으로 더 분산 이양돼야 한다.

<래디컬 헬프>에서 말하는 급진적인 대안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공동체 복지'라고 생각한다. 관료행정이 우선되는 복지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살아나는 복지이다. 더 이상 서비스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명확히 분리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격 여부를 판별하여, 혜택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을 매기는 복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복지는 상호 의존 체계 안에서 다양한 기회와 가능성이 열리는 복지이다. 오래 사는 것보다 잘 늙는 것이 중요하다. 잘 연결되어야 잘 늙는다. 폭설에 쌓인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동네였어도 이런 불안함, 위기감을 느꼈을까. 관계가 풍성하고 다양한 연결이 가능한 공간에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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