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금상 나누고, 꿈꾸는 삶 

          박 소 은
          박 소 은

의류수거함 털이라니! 의류수거함은 주로 의류를 정리할 때만 사용해왔고 그 옷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잘못된 행동이 확실하지만, 주인공 도로시와 함께 그 길을 걸으며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 바로 의류수거함이고, 그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것이 바로 의류수거함 털이였다.

우리 주변에서 의류수거함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자신에게 필요 없어지고 쓸모없어진 옷들을 정리하는 곳이지만, 책 속에서는 도로시에 의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지닌 곳이 된다. 아들을 잃고 아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해준다며 음식을 나누어주는 마마, 북한에서 건너와 홀로 생활하고 있는 카스삼촌, 길을 누비는 노숙자아저씨, 자살을 앞두고 자신을 정리하던 195 등 많은 이야기가 의류수거함을 돌아다니는 도로시를 통해 펼쳐진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를 통해 치유해나가는 이들과 마지막에는 죽음까지 생각했던 이 역시 도로시를 통해 다시 삶의 의지를 가지고 죽음이 아닌 미래를 향한 선택을 하게 된다.

인생은 B(Birth 탄생)D(Deaht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 라는 문장이 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선택들로 구성됨에 따라 생겨난 말이다. 아주 어릴 때의 선택들은 어떠한 근거에서 이뤄졌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시간을 지나 기억이 명확해지는 순간부터 여러 가지 경험들을 바탕으로 선택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들에서 나를 무너뜨리게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을 때 이야기 속의 195처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선택이 아닌 죽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생각하고 선택을 하려 한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순간들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중학생 시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탓에 모두가 다 가는 수학여행을 갈 수 없게 되자 많이 울었었다. 돈이 없어 가지 못한다는 창피함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합쳐지니, 무너짐의 크기를 정확하게 잴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었다. 그 후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도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입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집안 사정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수도 없던 시기였다. 그때그때마다 나는 195처럼 스스로를 내려놓았었다. 당장 선택지가 없었기에 미래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껏 우울해지던 시간들, 그리고 그 순간 195의 삶에 이유를 만들어주고 다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도로시와 같은 존재가 나타남에 따라 나 역시도 그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울고 있는 나를 위해 자신의 사비를 보태주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다시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며 너의 소중한 추억을 위해 사용하라며 흔쾌히 손을 내밀어주셨었다. 이와 함께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할 때 역시 평소 싸움을 더 많이 했던 언니가 여러 방면 도움을 통해 입학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그 덕에 무사히 졸업하며 지금까지의 삶을 그려나가게 되었다. 그 상황에 머물러 더 깊은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 삶이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렸던 당시의 나처럼, 그리고 195처럼 삶에 어려움을 겪고 무너지며 미래를 그리는 것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도로시와 같이 삶을 바꿔주고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다시 선택들을 그려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의류수거함. 그 의류수거함에 자신을 표현하며 자신을 붙잡아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195. 사실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있었기에 그런 마음이 통해 결국 다시 자신의 삶을 그려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아마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알아봐주고 자신을 붙잡아주길 원하지만,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 미래를 향한 선택이 아닌 죽음에 대한 근거를 찾고 죽음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그려 가면 좋을 텐데 말이다. 의류수거함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며 삶에 대한 의지를 바꿔놓았던 도로시처럼 그리고 그 도로시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마음에도 의류수거함을 지닌 채 삶에 대한 의지를 꾸려나가는 195처럼. 우리도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를 나누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도 미래를 향해 꿈꾸는 의류수거함을 지니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은상 /담을 넘은 아이를 읽고 

           유 귀 순
           유 귀 순

조선시대에 태어난 푸실이의 삶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었다. 중간중간 그림이 있어 읽은 내내 지루하지 않고 내용도 어린이들도 읽어도 좋을 뜻 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푸실이는 죽음을 각오하고 높은 담을 넘어 동생을 구한다. 푸실이 엄마 아빠도 동생이 못 먹고 죽는 것에 대해 동의가 아니라 시대환경에 눈물을 머금고 순응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자식이 본인 젖을 먹이지 못하면 죽을 것을 알면서 그것이 딸이라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이 세상에 없고 조선시대에도 없을 것이다. 그냥 시대 환경에 어쩔 수 없는 순응.

하지만 푸실이는 달랐다. 순응이 아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출하였다. 여자는 글을 배우는 것 자체가 사치. 그것도 양반댁 규수가 아닌 서민 푸실이가 글도 배우고 깨우침에 눈을 뜬 것이다.

조선시대 푸실이가 나였다면??

농사꾼 집에 21녀로 태어난 나의 배경과는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한 상황이다. 막내딸로 동생이 없는 나였다. 농사일도 막내라고 부모님이 배려해주셨고 우리 오빠의 경우 나를 항상 챙기고 날 괴롭히는 친구도 혼내주고 게임에서 내가 술래를 계속 못 벗어나면 술래를 자청해서 오빠가 바꾸어주고. 그런 사랑 받으며 자란 막내딸인 나로서 동생?? 아니 가족이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 시대가 조선시대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해야 한다. 하지만 난 용기가 부족하여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대감집 담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밤새 끙끙대며 묘책을 생각하고, 또 이런 환경을 원망하면서 밤을 지내는 나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 아들을 떠나 자식, 나의 분신,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경제적인 여건,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가족을 살리기 위하기 위한 순응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매일 밤 찢어지는 눈물 속의 삶을 사는 푸실이 엄마. 어쩌면 푸실이의 엄마랑 난 같은 사람인 것 같다. 묘책은 생각하다가 끝내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 딸 하나인 나의 입장에서 조선시대에서 안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조선시대에서는 나는 딸만 낳았다고 소박감 이었겠지~

관습은 현재에도 존재한다

아들이 최고이다~’ ‘아들이 있어야 제사를 지내주지~~’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젊은 직원들까지도 간혹 그런 풍습과 관습에서 못 헤어나오는 모습을 보면 아쉽다.

사람의 존엄성을 어찌 성별로 판단한단 말인가?

사람의 존엄성을 어찌 직위로 판단한단 말인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즉 사람은 높낮음이 없다는 말을 다시 되새김질하게 하는 책이다.

조선시대가 아닌 현재에도 대감처럼 으스대면서 사는 매스컴에 오르는 회장님, 사장님. 그것뿐인가! 잘사는 아파트 부모들은 못사는 아이들이 본인들 아파트에서 노는 것 자체도 싫어하고 어울리는 것 자체도 싫어해서 가른다.

너는 어느 아파트 사니?”

부모님은 뭐하시니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선택하지 못한 환경을 보고 그 아이를 평가한다.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아이를 보고 그렇게 평가를 하는 자체가 담을넘은 아이에서 나온 대감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

!!

!!!

이렇게 가슴을 꽉 막히게 하는 벽. 수많은 차별과 편견의 벽이 있는 요즘 세상. 원망이라는 감정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이 벽을 허물 수 있는 고민을 다시 하게 된다. 나 자신도 그렇게 벽을 쌓고 사람을 평가하는지 한번 반성한다.

우리 아이는 그런 주변 환경이 아닌 본인을 봐 주는 삶에서 살았으면 한다. 책을 많이 잃고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된다. 배움은 끝이 없고 실천하는 푸실이를 보며 그렇게 나만의 방법으로 힘차게 나아가 올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 이쁜 딸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현재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내년에는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동상 / 여자라서 

            이 숙

여자로 태어난 게 무슨 죄이며, 딸을 많이 난 게 어떤 죄이며, 딸 가진 부모가 어째서 죄인이란 말일까?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죗값을 톡톡히 치르며 살았다. 여자라서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았다. 여자라서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이름도 없는 관심 밖의 아이로 살다가 내 나이 다섯 살이 되어서야 출생신고를 했는지 지금의 내 나이와 주민등록상 나이가 무려 네 살 차이나 난다. 인생살이에 있어서 호적이 늦게 된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 때로는 부모를 원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따진 적도 있었다. 이유인즉 시나브로 아프기를 잘해서 하시며 말끝을 흐린다. 그게 말이나 된다는 것인가? 내가 아들이어도 그랬을까? 아니다! 아들이면 병원은 물론이며 무당까지 찾아가서 병 낫기 원하며 푸닥거리도 마다치 않고 했을 것이다. 우리 집은 그 시대 그 어떤 집보다도 아들 선호가 강했으니까. 내가 우등상을 받아와도 울 엄마는 쓸데없는 가시내가 공부는 잘해서 뭣 헌디야! 우리 종손 아무개가 잘해서 받아야지말도 안 된 소리를 하며 혀를 끌끌 찼던 울 엄마는 당신도 여자이면서 딸들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아주 많이 싫어서 이럴 거면 왜 날 낳았냐고 대들기도 했다. 참 철이 없었는가 보다. 그래도 이름은 막둥이라 안 하고 그 당시엔 흔하지 않은 외자로 해서이라 지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담을 넘은 아이란 책을 읽으며 푸실이와 아기를 보면서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아 맘이 참 아팠다. 나도 아기처럼 이름도 없이 호적도 없이 다섯 살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살았을 것이기에 죄인도 아닌데 우리 집에서는 가시내는 무조건 죄인이니까

나는 왜 푸실이처럼 바꿀 생각을 못 했을까? 대문으로 못 나가면 담을 넘으라는 푸실이의 말처럼 내가 나를 찾아 만들었어야 되는데 나는 어리석었다. 누가 해주기만 바라며 엄마만 원망했다. 푸실이는 나물죽 한 그릇도 배불리 못 먹으며 땟거리를 찾아 아기를 업고 산으로 들로 헤매면서도 글을 배우려 애썼다. 그런 아이에게 행운은 찾아왔다. 산에서 주운 한 권의 책, 차마 태우지 못한 그 한 권의 책으로 푸실이는 글을 읽게 되었다. 글을 아니까 생각도 달라지며 자존감이 생기며 당당해지기까지 했다. 지체 높은 대감마님께 불쌍하고 약한 자를 짓밟는다고 군자가 아니라고 당돌하게 맞서기도 했다. 푸실이를 그렇게 만든 것은 한 권의 버려진 책이었다.

효진 아가씨의 어머니는 뛰어난 글솜씨로 글을 쓰면서 내가 쓴 글로 이 답답한 세상을 바꾸리라 큰 뜻을 안고 썼다. 하지만 여자가 썼다는 이유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본인의 맘도 책장처럼 갈기갈기 찢기어 쌓이고 쌓여서 병이 되어 젖먹이 자식을 놔두고 세상과 하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태우지 못한 책이 있었다. 여군자전을 남기며 남편에게 부탁한다. 누군가에겐 읽게 해달라고. 얼마나 다행인가! 한 권의 책이라도 남아서, 결국엔 그 책까지도 연기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토록 글을 읽고 싶었던 푸실이가 읽고 힘을 얻어 여군자가 바꾸고 싶었던 것을 바꾸려 애쓴다. 신분이 낮아 천해서, 계집애라고 천해서, 철저하게 무시당해 죽음의 문턱까지 간 푸실이 동생 아기와 귀한 한준 도련님과 어머니의 젖을 나누자고 푸실이는 선비와 아가씨에게 제안한다. 그 말에 선비도 아가씨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그렇구나! 함께하면 되겠구나 하며 신분 성별을 떠나 두 아이를 살리려고 마음을 합친다. 여군자는 세상에 없어도 그가 그토록 세상을 바꾸고자 열망하며 썼던 글은 남아서 사람을 바꾸며 세상도 바꾸려 한다. 여군자도 여자이며 푸실이도 여자이다. 누가 여자는 약하다고 했을까? 천만에! 난 여자는 강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정에서도 어머니가 아니 아내가 없으면 그 가정은 온전히 꾸려가기가 힘들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요 홀어미는 은이 서 말이다는 말이 다 있을까. 그만치 여자는 인내심과 책임감이 있어 강하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도 비록 여자라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랐지만 결혼해서는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서 억척스럽고 강하게 살았기에 한 가정을 지켜냈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남녀구별이 없다. 그토록 멸시받고 자란 나도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른 가문에 들어와서 나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며 우리 가족에게는 물론이며 집안대소가 모두에게 인정받은 삶이었으며 행복한 어머니로 내 하고픈 일 하면서 가치 있고 알차게 익어가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너무 현실에 동떨어진 글 같았지만, 푸실이가 아기를 살릴 수 있을까? 너무도 궁금했으며 과연 작가가 지금 이 시대에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뭣일까 궁금했다. 끝부분에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선비와 아가씨 푸실이가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힘을 합치니까 변화가 생겼고 두 아이의 생명을 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도 네 편 내 편 학연·지연 편 가르지 말고 모두가 하나로 마음을 합쳐 모두가 잘사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타인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접촉을 피하고 자신의 동굴로 들어가 꽁꽁 숨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SNS 등을 통해 타인을 그리워하고 혼자임에 대한 불안 우울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정서적 거리두기가 아닌 정서적으로 보듬어 주면서 함께 우리라는 마음으로 이겨내 보는 것은 어떨까? 작가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마음 모아 함께 나아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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