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불상 전한 ‘마라난타’ 찾아 나선 순례길

전설속 성인으로 회자하고 있는 마라난타

최종걸
최종걸

순례단은 불두의 어원이 서린 탁실라를 떠나 부처님이 전생에 몸을 보시한 곳으로 알려진 페샤와르 지역을 향했다. 물론 그 길은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 초타 라호르를 향하는 길이었다. 마라난타 스님이 구도와 포교를 위해 걷고 배를 타고 중국과 백제에 왔다면, 순례단은 비행기와 버스로 이동했다. 첫 기착지 라호르부터 이슬라마바드 그리고 페샤와르에 이르는 길은 한국의 대우건설이 낸 길이었다. 파키스탄 최초의 6차선 551고속도로이다. 그 고속도로에는 삼미대우익스프레스라는 고속버스가 달리고 있었고, 승객은 파키스탄 사람들이었다. 우리 순례단을 태운 버스는 현지 버스지만 대우건설이 개통시킨 그 길을 따라 순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했다. 그 고속도로는 이를 개통시킨 대우건설 임직원에게는 무문관(바깥 출입을 금하고 방에서 수행하는 수행법)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대우건설 임직원 300여 명이 이 고속도로를 지난 1993년에 착공, 1997년 개통하기 전까지 귀국하지 않는 조건으로 파견됐기 때문이다. 4년간의 건설기간 동안 파키스탄에서 꼼짝없이 개통에만 전념했다는 후문이다.

그 고속도로를 따라 향한 페샤와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시비(Sibi) 왕이었을 때 독수리한테 쫓기는 비둘기를 대신하여 그의 살점을 독수리한테 떼 준 장소다. 또 전생에 수디라(Sudhira) 왕이었을 때 장님인 브라만에게 그의 눈을 빼 준 곳이며, 전생에 마하사트바(Mahasattva) 왕자였을 때 호랑이가 새끼를 낳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자기 몸을 찔러 피를 먹게 했는데 호랑이가 그를 먹어 버렸다는 비사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마라난타 스님 생가터 가는 길 훈드

페샤와르로 향하는 그 길에는 훈드 지역이 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건넜다는 인더스강 유역이 바로 그곳이다. 힌두 샤히(Hindu Shahiun) 왕조의 수도였다고 한다.

훈드는 인더스강 왼쪽 강변에 있는 간다라 스와비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인더스강을 건너간 중요한 역사적 도강 지점이라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알렉산더 포인트라고도 불렀다. 이곳에 훈드 박물관을 세우고 기념비도 세웠다. 동서를 잇는 카이버패스라는 고개를 넘어 인도로 침범하는 군대들은 거의 모두가 이곳을 거점으로 인더스강을 건너갔다고 한다.

중국의 삼장법사 현장 스님도 620년에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바센타라 왕자로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구전 때문이다. 훈드는 또한 산스크리트어 문법학자인 파니나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7세기경에 많은 불자가 다녀갔는데 특히 중국의 스님들이 다녀갔다고 전해진다. 부처님 본생경에는 이곳에서 일어난 6개의 송곳니를 가진 코끼리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다. 이 코끼리는 두 마리의 아내 코끼리와 함께 숲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코끼리는 숲속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와 부딪쳤다. 이에 나무가 흔들리자 꽃과 꽃가루가 한 아내 코끼리의 등 위에 떨어진 반면 다른 아내 코끼리 등에는 죽은 나뭇잎과 썩은 나뭇가지만이 떨어졌다. 이를 시기한 다른 아내 코끼리는 밥을 굶고 끝내 죽으면서 다음 생에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나기를 원했다. 다른 아내 코끼리는 원대로 다음 생에 베나레스라는 여왕으로 환생했다. 베나레스 여왕은 전생에 다른 코끼리 아내로 홀대받은 일을 되살려 복수를 결심하고 군사들에게 숲속에 있는 코끼리 왕을 죽이고 송곳니를 가져오라 명했다고 한다. 이에 군사들은 여왕의 명을 받고 숲속에 들어가 코끼리 왕을 찾아 독이 묻은 활로 쏴 죽였다. 그리고 송곳니를 잘라 여왕에게 바치면서 코끼리 왕이 순순히 송곳니를 내주었다고 보고했다. 그때야 베나레스 여왕은 자신의 어리석음 크게 뉘우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훈드지역에는 인더스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알렉산더 대왕의 도강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훈드박물관을 조성하고, 10높이의 기념탑도 세웠다. 박물관 내부에는 이 지역에서 발굴된 불상들이 소장돼 있다.

순례단이 훈드 지역을 특별히 들렸던 것은 마라난타 스님의 생가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중국 현장 스님도 620년 이곳을 지날 때 많은 불교사원과 스투파가 있었다고 한다. 마라난타 스님 생가 지역을 방문하기에 앞서 점심 무렵이라 라하둘라 칸이라는 장미농장 농장주의 초대를 받았다. 순례단과 현지 경호팀까지 40여 명을 저택에 초대해 성대한 점심 공양을 마련한 것이다. 종교와 나라는 달라도 성스러운 곳을 찾아 나서는 이들을 반기는 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1628년만에 마라난타 스님 생가터 초타라호르 순례

점심 공양을 마친 순례단은 장미농장을 떠나 전용차로 시골길을 30여 분 달리다 보니 마라난타 스님의 생가 지역인 초타 라호르에 닿았다. 384년 백제 침류왕의 초대로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이었다. 마라난타 스님은 이곳에서 탄생한 브라만 출신이었지만 출가 후 중국 동진을 거쳐 해류를 따라 영광군 법성포로 왔다. 마라난타 스님은 불법을 전하기 위해 왔지만, 필자는 그 스님의 탄생지를 역으로 찾아온 것이다. 순례단 중 영광 출신은 필자가 유일했기 때문에 감격과 감동은 남달랐다.

마을은 우리네 그 옛날 시골 마을처럼 소박했다. 그 마을에 대형버스와 무장한 경호 차량이 들어서니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통역에 나선 박교순 교수는 마라난타 스님이 외국으로 가서 큰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이곳 마을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마라난타 스님의 생가터에는 당시 커다란 스투파(사리탑)가 있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순례단 일행은 그 흔적만 남은 스투파 앞에 임시로 마련한 돗자리를 펼치고 예를 표하는 임시 법회를 봉행했다. 물론 마라난타 스님이 한국에 불법을 전해준 무량 공덕을 찬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촐히 마련한 과일과 꽃을 차려놓고 합장한 자세로 반야심경을 힘찬 목소리로 독경하자 동네 주민들은 의아해했다. 폐허나 다름없는 곳에 수십 명의 순례객이 예의를 갖추고 의식을 올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감격에 겨운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독경을 하자 이들의 표정은 갈수록 경건해졌다. 어색함도 잠시였다. 짧았지만 경건한 법회를 통해 순례단은 불교를 전한 성인의 생가터를 찾은 희열로, 그 동네 사람들은 전설 속의 그 나라에서 찾아 온 대한민국의 순례단에 대한 반가움이 교차했다.

순례단 일행은 마을 촌장에게 이곳 출신인 마라난타 스님이 한국에 불법을 전한 성인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그 흔적을 마을 어귀에 표시해 달라고 당부했다. 순례단 일행은 마라난타 스님의 생가터 순례를 뒤로하고 스님이 브라만 가문에서 불가로 입문 후 수행했던 페샤와르와 스와트 성지 일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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