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불상 전한 ‘마라난타’ 찾아 나선 순례길

마라난타가 백제에 진리의 길을 냈다면

대우건설은 파키스탄의 경제부흥을 도모하는 고속도로 건설

최종걸
최종걸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에 진리라는 불법(佛法)의 길을 냈다면 우리는 그의 고향에 경제의 길을 냈다. 동서양 교통의 요충지 파키스탄 심장을 이어주는 길을 한국의 대우건설이 개통시켰기 때문이다. 순례단도 한국의 대우건설이 개통한 그 고속도로를 따라 페샤와르까지 이동했다. 마치 마라난타 스님이 그곳에서 이역만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384년 영광 법성포라는 불법이라는 문화 실크로드를 냈듯이 한국의 대우건설은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고속도로를 개통해 경제부흥의 길을 열었다. 마라난타 스님의 생가 터를 나와 광활한 평야를 3시간가량 가자 앞에 높은 산맥 줄기가 펼쳐져 있었다. 그 길은 카이버 패스라는 길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잇는 유일한 고속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2300년전 알렉산더 대왕도 이 험준한 고개를 넘어 인도 북부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카자흐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를 잇는 서남아 경제블록의 중심도로(모터웨이 프로젝트)로 육성하고자 M-2를 만들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분쟁지역이 되면서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은 잠재돼 있었다. 그 곳에 주재하는 외국 대사관 대사들은 필자에게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세계 경제 중심국가로 들어선 것은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지만 자원 부국 파키스탄이 못살고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귀띔한 것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길을 달려 간다라 문명의 중심지였던 페샤와르로 향했다.

 

간다라 출신 마라난타가 백제 왕사였다면

파드마삼바바는 티벳불교의 부처님 역할

페샤와르와 스와트는 불교사에 길이 빛나는 유식 사상가인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의 고향이자 티베트에서는 제2 부처님이라고 불리는 파드마삼바바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렇듯 페샤와르와 스와트 지역은 파키스탄의 카이버박툰카와주 지역의 간다라 불교 사상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페샤와르는 쿠샨왕조의 수도로 사람들의 도시(City of men)’, 또는 꽃의 도시(City of flower)’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카니시카 왕은 이곳을 쿠샨왕조의 수도로 삼고, 신성한 불교의 터전으로 조성했다. 또한 카니시카 왕이 세운 거대한 대탑과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직후 처음으로 공양을 받은 발우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신라시대 혜초 스님을 포함한 중국의 많은 순례 스님들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순례단이 페샤와르에 도착하자 카이버박툰카와주 샤 관광 장관은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파키스탄 대표단 일행으로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순례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샤 장관은 스투코로 조성된 부처님 흉상을 순례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증정식을 하는 의례로 환영을 표했다. 환담이 오가는 사이에 본인도 순례단 길에 함께 동행 할 것이니 안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간다라 최고의 명상 수행 센터 탁트히바히

장관 접견과 환대를 마치고 버스로 80를 달려 간다라 불교의 최대 명상 수행센터로 향했다. 순례단 일행은 샤 장관의 안내로 굽이굽이 계단을 올라 정상 부근의 드넓은 탁트리바히 수행센터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한 공양물과 꽃으로 탁트히바히 경내 스투파(사리탑) 앞에서 예불을 마친 후 탑돌이를 했다. 탁트히바히는 기원전에 3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 정진했던 곳으로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었다. ‘높은 산에서 물이 나오는 곳이란 이름인 탁트히바히는 기원전 1세기경 수행센터를 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불교로 말하면 선원에 해당하는 탁트히바히 내 한 중앙에는 거대한 스투파(사리탑)가 조성돼 있고, 주위에는 여러 감실이 둘러싸여 있었다. 스투파 주위 감실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또한 한 쪽에는 스님들이 명상을 했던 낮은 천정의 한 토굴이 눈에 들어왔다. 승원 안에서 발견된 조각들은 여러 형의 불상을 비롯하여 부처님 일대기를 전하는 조각상들로 장식돼 있었다. 탁트히바히 수행센터는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보존된 상태였다. 요사채, 주방 그리고 명상 토굴도 복원시켜 이곳이 수행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 토마스도 이곳에 와서 명상했다는 토굴도 직접 들어가 보았다. 수천 년 전 수행자들의 엄숙했던 수행 장면이 그려졌다. 그 탁트히바히 수행센터에서 수행했을 마라난타 스님을 회상하기 위해 법성포 어귀에는 마라난타 스님을 기념하는 뜻에서 탁트히바히 수행센터를 모형물로 조성해 놓고 있다(기왕이면 제대로 복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고향을 갈때마다 느끼는 마음이다).

 

불탑의 상징 카니시카 대탑 흔적을 찾아서

카니시카 대탑에 대한 중국 당나라때 현장 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여래께서 아난에게 내가 입멸한 후 500년이 지난 후 이 세상에 카니시카 라는 뛰어난 왕이 나타나 이곳에 큰 탑을 세울 것이며 내 몸의 골육 사리가 거의 여기에 모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석가여래가 입멸한 뒤 500년이 지난 다음 카니시카 왕이 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러나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카니시카 왕은 사냥을 나가서 흰 토끼를 쫓아갔는데 어느 장소에 이르자 토끼는 사라지고 어느 소를 돌보는 아이가 숲속에서 작은 탑을 만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왕이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니 목동은 옛날 석가여래가 이 세상에 출중한 왕이 나타나 이 장소에 탑을 세울 것이다. 내 몸의 사리의 대부분이 그 안에 모일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셨다고 답했다. 이어 대왕은 훌륭한 덕을 전생에 심었고 이름 또한 옛날 석가여래의 예언과 똑같습니다. 훌륭한 공과 뛰어난 복운으로 이 시기를 잘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알려 드리려 한 것입니다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 카니시카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자기의 이름이 성인의 예언과 맞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탑을 돌며 돌탑을 세우면 그 공덕의 힘으로 작은 탑을 덮을 수 있도록 발원했다. 차츰 돌탑의 높이가 400척을 넘고 그 기초가 서 있는 곳의 주위가 1기단은 5층으로 높이 150척이 되어서야 겨우 작은 탑을 덮을 수 있었다. 이에 카니시카 왕은 기뻐하여 다시 그 위에 25층의 금동 탑머리를 세우고 석가여래의 사리 1(10)을 그 안에 안치하여 봉헌했다. 탑을 세우고 난 후 보니 작은 스투파가 큰 탑의 기단 귀퉁이에 반쯤 나와 있었다. 왕은 작은 스투파 탑이 조화롭지 못해서 이 탑을 없애도록 하였다. 그러나 없애려는 동시 그 작은 탑은 굳어버렸고 작은 탑이 있던 원래 자리에 또 하나의 탑이 생겼다. 그래서 왕은 자조적인 말로 , 사람의 일은 잘못되기 쉽고 부처님 하시는 일은 덮을 수가 없구나. 부처님이 하시는 신령스러운 일에 어찌 사람의 생각으로 따라갈 수 있겠는가하며 참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두 개의 탑에서 병에 걸려 낫고자 하는 자는 향을 바르고, 꽃을 뿌려 진심으로 귀의하면 완전히 낫는다는 기록과 함께 햇빛이 나면 이 탑은 금빛으로 빛났다고 한다. 신라 혜초 스님은 이 탑에 대해 세친과 무착 보살이 주석하던 절로써 이 절에 큰 탑이 있는데 늘 빛을 발한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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