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군 청년센터가 청년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고, 청년들의 삶을 들으며 격려와 위로, 희망과 꿈을 전달하고자 ‘2022 청년 에세이(그럼에도 청년) 공모전을 추진했다. 본지는 입상한 6편의 작품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청담정담 시즌2 에세이에 담긴 청년들의 속마음

올해도 청년들의 마음의 소리를 담아, 영광에 사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공모전을 진행하여 다수의 수상작을 배출했다. 청년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인지, 청년들이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는지. 우리가 알고 싶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에세이에 담아 나누는 행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청년에 대해 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는 6명의 청년 에세이가 본선에 진출했으며, 황대권 작가, 이태범 시인이 참여하여 청년들의 이야기에 대한 피드백을 전했고, 격려와 칭찬의 물결이 일렁였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답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일이지, 그들을 평가하고 판단해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귀를 가져야, 청년들을 이해하고, 청년들이 원하는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에세이에서 전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것이다.

 

<우수상 1 김정석> 나는 영광을 좋아하나보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영광에 대해 불만이 참 많았다. 학창시절 나는 불갑에 살았기에 통학버스를 타거나 부모님의 차량으로 이동해야 했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고도 싶은데 버스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하는 현실에 짜증을 호소했다. 배차간격도 짧아지고 늦은 시간까지 버스가 돌아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실현가능성이 없으니 얼른 대학생이 되어 운전을 하면서 자유를 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겐 불만이 있었다. 1시간만 이동하면 도심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문화생활, 여가생활, 프랜차이즈음식점 등은 영광에 없었다. ‘여긴 시골이니깐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 영광은 도심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수가 적어서 여러 시설들이 없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들이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젠 불만보단 포기타협으로 내 생각은 굳혀졌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영광은 고향의 의미로만 남아있었지 가고 싶고, 찾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렇게 영광의 존재는 조금씩 무뎌졌다.

여느 때와 같이 타지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을 뵈러 영광에 왔는데 평소 같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새로운 가게나 건물들, 정돈된 도로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나에겐 불만사항이었던 것들이 하나하나 변화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에 드는 생각은 이야 드디어 영광이 좋아지는구나.’, ‘나 때는 참 불편했는데라는 생각이었지만 이후에 드는 생각은 약간의 창피함이었다. 마치 맛있는 과자를 사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저 방관자로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민원게시판에 바라는 점도 적을 수 있을 테고, 부모님께 영광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면 좋을지 말씀드려서 어른들에게도 나의 생각이 공유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하는 작은 후회가 됐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내가 영광을 좋아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을 할 즈음에 다시 본가로 돌아와 영광에 살게 되었다. 이젠 예전처럼 그저 방관자로 살기 싫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영광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하고 뭐라도 실천하고 싶었다. 일차원적 접근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에 지금 내가 영광에 대해 어떤 불만사항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나의 불만을 발전으로 개선해보고자 했던 것은 주차이다.

최근 대신지구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 갓길에 주차라인을 확보하여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량 한 대당 주차구역을 칸별로 나누지 않아서 차량들이 간격을 넓게 주차하는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칸별로 주차하였으면 2-3대도 충분히 더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인데, 그렇게 활용되지 못하는 게 아쉬워서 해당내용을 안전신문고를 통해 개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영광군에서 해당사항을 검토해서 조치를 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저 불평불만만 늘어놓던 나였는데, 나의 편의와 군민들의 편의를 위해 무언가를 실천했음에 뿌듯함을 느꼈다.

나의 실천에 보람을 느끼게 되니 한 가지 더 제안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만남의 광장에 버스 승하차장을 비롯한 안전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장애인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서 장애학생을 픽업을 할 때면 만남의 광장으로 가서 통학버스에서 하차하는 아이를 태우고 지역아동센터에 바래다주었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광장에는 수많은 학원차량, 학부모들의 차량, 통학버스 등이 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곳은 교통의 요충지인 삼거리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인접해 있어 학생들이 많이 오가는 곳인데 안전에 관해 대비가 미흡하여 위험한 상황을 수차례 목격하였다. 갓길에 차가 정차해 있으니 아이들이 옆 차선 차량을 확인하지 못하고 도로를 횡단하려다 부딪칠 뻔한 장면, 그리고 광장 내에서 차량이 회차를 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를 미쳐 보지 못하고 부딪힐 뻔한 장면 등을 목격했다. 이러한 위험요소가 안전사고로 발전될 수도 있으니 빨리 개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버스전용 승하차장 설치, 아이들이 차량을 기다리는 공간, 광장 내 주차라인과 회전방향 설정으로 인해 안전사고 방지 등에 대해 고민했다. 아직 해당 내용에 대해 신문고에 제출하지 않았으나 조만간 제출할 계획이다.

나는 오랜 시간 방관자, 회피자로 그냥 영광 거주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영광 군민으로서 나의 불평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불평이 다른 사람의 불평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영광이 될까? 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 나의 작은 노력이 모이면 학창시절 나처럼 영광을 바라봤던 사람들도 영광에 대해 애정을 가질 수 있고, 더 빨리 생각이 바뀔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불평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더 오고 싶고 더 찾고 싶은 영광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나는 영광을 꽤 많이 좋아하나 보다.

 

<우수상 2 박지아> 울타리 벗어나기

··고등학교를 영광에서 자라오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집을 벗어나 독립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졸업을 하고 집과 멀리 떨어진 서울로 학교를 정하고 떠났었다. 처음으로 혼자 내린 큰 결정이었다. 1~2개월은 새로운 환경들과 다양한 문화공간들로 즐겁고 설레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설렘은 그리 길게 가지 않고 끝나버렸다. 빠르게 흘러가는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졸업을 마치고 바로 영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성인이 되면 무엇이든 자유로울 줄 알았던 나는 집으로 오게 되며 달라진 생활패턴으로 부모님과 잦은 다툼이 생겨나게 되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독립이 되지 않고 그냥 나의 편안함만을 찾으며 자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다잡고 첫 번째로는 경제적 독립을 먼저 하기로 시작하였다. 마트, 식당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고정적인 직장을 찾기까지 4~5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1년간은 지갑에 채워지는 돈들로 나를 외적으로 꾸미기에 바빴으며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20대 후반의 나이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독립의 문 앞에 서있었다.

두 번째로는 육체적 독립이었다. 학교생활 이외에는 집을 떠나 생활해 본 적 없던 나에게는 무척 꿈같은 일이었고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다니며 절약되는 돈이 40~50만원이 되다보니 쉽게 독립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2년 전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청년마을이 되며 청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쉐어하우스가 생겨나며 첫 입주자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꿈꿔왔던 일이 가능해지며 바로 입주를 하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에 이것저것 물건을 구매해 나만의 방으로 꾸미고 정리하였지만 이내 금방 어지럽혀지고 치우고하는 일이 반복이 되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셨던 일들이 나 스스로 하다 보니 독립도 쉽지 않은 일이구나를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신적 독립은 경제적, 육체적으로의 독립이 이루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건강한 정신적 독립이 가능했던 것 같다. 두 가지의 독립을 이루며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게 되며 더 자주 찾아뵙고 도와드리는 것이 기쁜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나의 고향 영광에서 살아가며 나의 울타리에서 독립을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고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경험들로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이모, 선생님이 되었고 그 아이들이 전보다는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나는 10년간의 라는 청년을 찾기 위하여 방법들을 찾았고 왜 계속 영광에서 있어?’라는 말들을 들었다면 30대의 앞으로의 나는 영광에서 사는 것도 좋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려고 한다. 많은 청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새롭고 넓은 울타리가 되는 영광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수상 3 신성신> 이방인의 영광살이

영광읍 순천처녀. 나는 29년산 순천 토박이다. 대학교까지 순천에서 나왔으니 진또배기 순천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내가 부모님의 둥지에서 뛰쳐나와 첫 둥지를 튼 곳은 영광이다. ‘영광하면 굴비는 알았지만, 영광이 같은 전라남도인지도, 굴비가 생선 이름인 줄 알았던 나에겐 굉장히 생소한 곳이었다.

직장으로 오게 된 영광. 처음 왔을 땐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문화적 충격은 두루 말할 수가 없다. 다들 군청을 간다고 했다. 군청이 뭔가 했는데, 영광군의 관청. 평생 시청만 알고 살았던 나에게는 문화 충격이였다. 그리고 54천명 지키기 운동, 내 고향 내 주소 갖기 운동을 했다. 인구 숫자에 예민한 것이 두 번째 문화 충격이었다.

우리 회사는 타지역에서 모인 이방인*들이 많기에 영광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라곤 업무중 만나는 사람들과 점심 식당 사장님. 영광 현지 친구를 사귀고자 해도 계기가 없어 불가능했다. 우리는 그럴수록 우리만의 둥지 안에서 더욱 똘똘 뭉쳤다.

이런 내가 두 번째 둥지에서 나온 계기는 청년센터였다. <우리끼리 한 끼>라는 행사를 알게 되었는데 밥을 준다고 해서 신청했다.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하진 않지만, 밀키트를 제공하니 zoom으로 같이 먹자는 프로그램의 취지가 신선해서 신청해봤다. 처음엔 먹방인줄 알았다. 막상 참여해보니 영광에 20대라곤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양한 사람들을 온라인으로 만나서 얘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이때를 계기로 청년센터에서 매달 행사문자를 받았고, 군민의 날, 체력 측정 데이, 모임 지원사업 등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중 내가 올 한해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청년 싱크탱크단체에 함께한 것이다. 청년 싱크탱크.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영광군 관련 청년 정책 제안 및 모니터링, 현안 문제 수집 등의 일을 하는 단체다. 현재 청년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새로운 정책을 청년들이 직접 제안해보자! 라는 목표로 매달 1-2회 오프라인 회의를 했다. 개인사업자, 은행, 관공서 직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니,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우리는 20대부터 40.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졌다.

나에게도 드디어 영광 현지인 친구가 생겼다. 이렇게 하나 둘 터를 잡아가다보면 진정한 영광 군민이 되겠지....

나는 영광군 청년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뜨겁게 움직이는 이상 영광군은 소멸되지 않겠다는 희망이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있는 이방인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방인이여 밖으로 나오라. 그리고 도전하라....!!!

* 실직적으로 이방인은 다른 나라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문학적 표현으로 외지인 대신 이방인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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