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군 청년센터가 청년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고, 청년들의 삶을 들으며 격려와 위로, 희망과 꿈을 전달하고자 ‘2022 청년 에세이(그럼에도 청년) 공모전’을 추진했다. 본지는 입상한 6편의 작품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청담정담 시즌2 에세이에 담긴 청년들의 속마음
<최우수상 1 하영> 만나서 영광입니다
20대 후반이 된 이후로 어느샌가 제철을 따지는 인간이 되었다. 그건 내가 시골 인간이 다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철 과일과 제철 채소를 키우게 된 조금 철이 든 인간.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4년이 되어간다. 나의 보이는 직업은 카페 사장. 그 속에서 나는 다양한 일들을 하며 먹고 살아가고 있다. 돈을 벌어야만 그 일이 직업으로 인정된다면, 글쎄 현재 나는 3-4가지 정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커피를 팔고, 남는 시간에는 웹툰 채색 어시스트로서 작업을 하며, 여름에는 부지런히 채소들을 가꿔 소량 판매하는 농사꾼이, 가을에는 나뭇가지를 잘라다가 파는 나무꾼이 된다. 때때로 손으로 꼼지락거려 만든 것들을 판매하기도 한다.
친구 한 명 없는 이곳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막막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으며, 그 당시 주거 공간도 마땅치 않아 부모님께 신세를 져야만 했다. 차가 없으니 교통 시스템도 한정적이고, 또래 친구를 사귀기도 어렵게 느껴졌다. 주말이 찾아오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김없이 익숙한 도시로 향했다. 그렇게 영광과 도시를 방황하던 나는 점차 지쳐갔다. 몸은 분명 영광에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매주 도시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흙을 만졌다. 메말랐던 마당에 장미와 허브를 잔뜩 심고, 채소 씨앗을 뿌렸다. 앞만 보고 달려갔던 내가 낮엔 초록빛 땅을, 밤엔 별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고 있다.
나의 마음이 초록빛으로 차오를 무렵, 영광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작은 영화관이 생겼고, 새로 생긴 터미널 건물엔 가축이 아닌 반려동물을 위한 병원도 들어섰다. 나도 점차 이곳에서의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광의 참맛을 알게 된 것이다.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맑은 공기와 마당을 가꾸는 즐거움을, 부담스럽다 느꼈던 이웃들의 한결같은 다정함을 나는 보았다.
영광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을 꼽아보자면 바로 '사람'이다. 나이대와 상관없이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타 지역에서 영광으로 온 사람들과 마음이 맞아 독서모임을 운영하며 삶의 권태를 우정과 사랑으로 채워나갔다. 사람과 사랑이 채워지자 여유가 생겼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도시의 삶이 더는 그립지 않다. 흙을 만지고 책을 읽는. 차를 마시며 요가를 하는 이곳에서의 삶이 참 따뜻하다.
며칠 전, 평택에 살던 언니가 내려와 함께 살 집을 구했다. 서울이 아닌 삶을 상상해 본 적도 없던 우리가 이곳 영광에 터를 잡다니. 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막막함일지, 기대일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겁먹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내가 흔쾌히 영광에 숨은 맛집과 안주가 기가 막힌 술집, 노을이 끝내주는 백수해안 도로까지 코스로 안내해 줄 테니 말이다.
이토록 소박하고 무탈한 영광의 삶을 많은 이들에게 공유하고 싶다. 조금만 귀 기울여보면 이곳도 도시 못지않은 다채로움과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시골' 이란 투박한 두 글자 안에 담긴 삶의 여유와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는 사유의 시간을, 그 가치를 알아봐 주기를 희념한다.
<최우수상 2 최수경> 아직은 청년, 영원히 청년이고 싶어라
전라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남도에 내려올 일은 거의 없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살며 대부분 대전이나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익숙했지 아래로 내려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영광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사방에서 따스한 봄 흙냄새가 올라오고 보리들이 제법 훈훈한 바람결에 고개를 흔들며 나날이 여물어 가는 때였다. 2002년 부모님을 모시고 영광을 찾았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 생의 끝자락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다.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 영촌마을,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영광에서 아버지의 병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바라며 길용리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하루 아침에 환자가 된 아버지, 하릴없이 하루 일과를 보내는 게 고역이었으리리. 아버지는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낮에는 낚시를 했다. 주변은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푸르른 나무가 가득하니 공기도 좋았다. 요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이 곳에서 조금이나마 호전되리라는 기대와 두려움으로 하루 하루 기도하며 지냈다.
어느 날 이웃 할머니께서 채소가 가득 담긴 소쿠리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 마을속에 살았지만 먼저 인사조차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고요한 손길이 다가온 것이다. 문득 그동안 내가 사람을 목적을 가지고 대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거칠고 투박하지만 넉넉한 마음 씀에 가슴이 훈훈해 왔다. 그냥 수다만 떨어도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의 의욕이 생기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우리 가족에게 조용히 다가온 손길은 뿌리칠 수 없는 정다움이었다. 각박했던 마음에 인간의 온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던 그때의 기억은 아랫목만큼이나 아늑함으로 자리 잡는다. 오월 중순의 들판에는 훈훈한 늦봄의 생기가 부드럽게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이렇게 시작한 영광은 사랑스런 동네였다. 겉으로는 서로 아웅다웅하며 사는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가족처럼, 친한 이웃처럼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하며 사는 동네라는 나름의 결론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청년 시절, 영광에서 직장을 얻고 20년을 지내며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영광으로 이사를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데 나는 오히려 시골로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친정에 가면 주변 어른들이 영광 애기들이라 부르곤했다. 아이들은 그것이 촌놈을 뜻한다며 극구 부인했다. 그랬던 두 아이가 건강히 유년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둘째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시골이라고 해서 오히려 혜택을 보았으면 보았지 손해를 본 것은 없던 것 같다. 영어, 수학 학원은 안 다녔어도 대신 산과 들을 맘껏 뛰어 다녔고 갯벌에 가서 조개도 줍고 모래놀이도 실컷했다. 군에서 지원하는 승마며 수상스키 등의 레져 스포츠를 즐겼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첼로와 클라리넷을 배우고 예술의 전당에서 영화와 뮤지컬을 관람하며 도시아이 못지 않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 어쩌면 도시에만 살았다면 이런 다양한 경험과 혜택을 모른 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본 영광지역 중고생 교육여건은 선택의 폭이 좁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많고, 사교육을 받으러 광주로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자녀를 잘 키우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과 열정은 누구 못지 않았다. 도시에 산다고 그 열정이 더 크고 시골에 산다고 그 마음이 작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고민을 나누며 마을교육공동체 활동을 시작했다. 초등생부터 중학생까지 자녀를 둔 부모들의 모임, 대부분 고민하는 지점은 비슷했다. 서로 비교하며 불안해 하기보다는 서로 응원하며 그 마음을 달랬다. 비교는 암이고 걱정은 독이라는 말처럼 누군가와 비교하면 끝이 없었다. 문제를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찾고 해결하려는 마음이 앞섰다. 이런 문제가 영광을 벗어난다고 크게 달라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속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자녀의 인성교육을 위한 학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교육했다.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나 간섭은 학생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증진하는데 가장 큰 방해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 교육을 통해 자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녀교육의 주체로 멘토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우리 청년들이 그런 문화를 선도해 나가면 어떨까?
청년센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코로나가 시작된 시기와 맞물린다. 청년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책소리>라는 독서토론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독서와 토론을 통해 지역의 독서문화를 선도하고자 하는 작은 바람에서 출발했다. 독서는 생활이고 문화라는 믿음으로 시작된 신박한 도전 프로젝트. 좋은 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건강한 습관, 건전한 취미생활을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 어른들부터 실천하다보면 자녀들도 자연히 보고 배우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해라’가 아닌 ‘함께 하자’로 할 때 자녀들도 책읽기에 동참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콩나물을 기를 때 물은 밑으로 빠져 나가지만 콩나물은 쑥쑥 자라는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도 시나브로 자라리라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책 읽는 마을, 영광>을 마음속으로 그리게 되었다. 꿈의 도시가 아닌 실제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다함께 책읽기에 동참하고 실천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또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 활동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변화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는 누가 시켜서 변화가 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변화가 우선이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한탄하고 아쉬워 말고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이 되리라. 묵은 생각을 꺼내 햇살에 말리며 그럼에도 아직은 청년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