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불상 전한 ‘마라난타’ 찾아 나선 순례길

제국의 무덤말란칸드 패스

최종걸/ 전 연합뉴스 기자
최종걸/ 전 연합뉴스 기자

순례단 일행은 파키스탄 지역 간다라불교 마지막 성지인 스와트의 부트카라 스투파(사리탑) 친견을 위해 말라칸드 패스(Malakand pass 말라칸드 고갯길)를 넘었다. 이 길은 파키스탄 북부에서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 중부를 연결하는 힌두쿠시라는 산맥 속에 있다. 수천 년 역사를 써오는 사이에 제국의 무덤이라 할 만큼 수많은 전쟁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근세기에는 영국과 소련(러시아)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도 이곳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철수했다. 옛날 페르시아 군대가 인도 북부에 침입하여 힌두 인도인들을 노예로 잡아 이동시키면서 이 길에서 수많은 인도 노예들이 죽었는데 그 후부터 이 산맥을 힌두쿠시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쿠시는 우르두어로 죽음을 뜻한다. , 힌두쿠시는 죽음의 길인 셈이다. 그만큼 험하다는 이야기다.

순례단이 넘은 말라칸드 고개는 영국 처칠경이 1897년 종군 기자이자 보병 소위 시절 말라칸드 고개 밑에 자리 잡은 병영을 설명하는 데서도 나온다. 이곳은 분화구 같아서 마치 깨진 사발의 이처럼 주위에 높은 산봉우리가 둘러 있어 진지를 공격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한다. 말라칸드 고개 정상에는 아직도 옛날의 작은 성곽이 남아 있었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오래전에 개척된 실크로드(비단길)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 길을 오가고 있다. 순례단은 새로 낸 길을 따라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고갯길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고개를 마치 등을 구부린 사람의 등뼈처럼 여러 봉우리들이 길게 어우러져 있어 말라칸다라고 불렀다. 높은데다 굴곡이 많아 이 굴곡을 돌아 넘어가는 데는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노련한 버스 기사의 운전 솜씨가 아니면 고개를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다.

고고학적으로 말라칸드 패스 지역은 간다라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는 많은 불교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간다라지역 마지막 불교를 신앙하는 왕은 지라 왕으로 900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왕국이 이 지역을 탐을 내 정복하려 했지만 여러 부족들이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어느 한 왕국도 이 지역 부족들을 정복, 통합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1882년 영국군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고개 넘어 영국군 기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자 이곳을 사수하려는 지역 부족과 전투가 벌어졌다. 강력한 영국군의 화력으로 인해 이 지역 부족들이 패하기는 했지만 영국군도 전투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마치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대항한 것과 같다.

이 지역의 여러 부족 가운데 하나가 악명 높은 파탄족인데 이 고개를 넘어가는 외국인들에게는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1897년 파탄족의 반란을 진압한 영국군은 전쟁 상황에서 부상병을 현지에 남겨 놓지 않고 목을 끌고서라도 함께 후퇴했다고 한다. 이유는 부상병이 파탄족의 손에 넘어갈 경우 사지를 자르고 각종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살육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간다라 지역 부족들이 영국과 소련. 그리고 미국이라는 제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보여준 처절했던 기록들이 곳곳에 전한다. 알카에다와 탈레반의 주 거점이 바로 이곳 파키스탄 북쪽과 아프가니스탄 남부쪽 접경지역이다.

 

죽음의 고개 넘어 만난 파괴된 부트카라 스투파

그 험한 고개를 넘어 스와트 불교 유적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인 부트카라 스투파를 친견했다. 이곳에 최초로 스투파를 세운 사람은 아쇼카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보수되고 증축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지금은 파괴되고 부서진 흔적만 전해질 뿐이다. 침략전쟁에서 문화유산이란 한낱 거추장스런 장애물처럼 보였다.

스와트 지역은 간다라 불교의 중요한 불교 신행 중심지였지만 알렉산더 대왕과 지역 부족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왕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더스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스와트 지방을 지나면서 네 번의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 후 기원전 2세기경인 아쇼카 대왕 당시부터 기원후 9세기까지 이 지역에서 불교가 크게 꽃을 피웠다. 간다라불교의 전성시대였다. 1400여개의 승원이 세워지고 수많은 불상들이 조성될 만큼 불교유적의 보고였다.

이슬람교가 간다라 지역인 이곳에 들어온 것은 7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불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해 온 것은 당시 이슬람교는 불교 승원과 스님들의 신행행위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다라 지역의 불교와 이슬람교의 공존은 이곳을 점령한 마흐무드 가즈니가 998~1030년 사이 통치하는 동안 종지부를 찍었다. 마흐무드는 당시 간다라 지방을 통치하던 힌두왕 자야팔라를 쫒아내고 그의 아들을 암살, 1012년 간다라지역 불교의 막을 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마치 탈레반이 지난 2001년 파키스탄 북쪽과 인접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는 높이가 53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부처님 입상인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모습과 겹쳐진다. 마흐무드는 불교승원과 승단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압박함으로써 승단은 점차로 그 세를 잃어갔고 마침내 간다라지방의 불교는 더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16세기 무굴제국이 이 계곡으로 침입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무굴제국의 아크바 황제도 이곳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19세기에는 아쿤드가 이 지역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형성했고, 이슬람교의 수피(신비주의)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곳 스와트 지역의 부트카라 스투파(Butkara Stupa)는 지난 1956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스투파와 그 주변이 그리스식 건축 양식으로 장엄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건축 양식으로 미루어 그리스와 간다라 왕조의 후원 하에 보수와 증축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간다라 불교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전도 간다라와 그리스 왕조 때인 기원전 1세기경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고고학팀은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유품들을 본국으로 옮겨서 투린 동양박물관에 전시중이라고 한다.

 

문화유산도 힘이 있을 때나 보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간다라

수많은 침탈과정에서 수탈한 문화재들이 정작 본 고장에는 없고 타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사례 중 하나이다. 문화도 결국 힘이 있을 때나 보존되고 발전된다는 것을 간다라지역 불교유적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러니 하게도 정확하게 언제 간다라 지역인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불교승원이 마지막 폐쇄됐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슬람교의 도래와 함께 간다리 지방의 많은 불교 유산들을 이슬람교 후손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파괴된 불교 유산을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이 유네스코의 후원 아래 보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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