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강구현 시인

3. 겨울 강가에서

염산초등학교 3년 중퇴, 동생의 학력은 그것이 전부였다.

나의 아버님께서는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하는 욕심에 어려운 농촌 살림 속에서도 나와, 내 바로 아래인 남동생,

그리고 그 아래 여동생의 주민등록지까지 옮겨가며 학구 편재상 우리 마을에서 다녀야 할 염산서초등학교를 보내지 않고 소재지에 있는 염산초등학교를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그 지나친 교육열이 결국은 여동생을 초등학교 3학년으로 중퇴하게 한 화근이 되고 말았다.

나와 남동생은 어떻게든 10여리가 넘는 그 학교를 1학년 때부터 걸어 다니며 간신히 졸업을 할 수 있었지만 여동생은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혼자서 오가야 하는 그 등·하교 길이 너무도 멀고 버거웠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 다니는 것을 포기한 여동생은 자연스럽게 그 아래 동생들을 엄마 대신 업어서 키우는 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생이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하시면서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크게 나무라지 않고 묵인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생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아직도 자신이 업어서 키워야 할 어린 동생을 걱정하면서 상경을 했다.

그때 동생 친구들은 새하얀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도봉동 이모님 댁에서 기거하며 공장 일을 비롯해 돈 버는 일에만 열중했던 동생은 자신의 나이도 잊은 채 어느덧 혼기를 놓쳐버린 노처녀가 되어버렸다.

그 알량한 학력 또한 동생의 결혼을 막는 걸림돌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혼 같은 건 아예 포기했던 동생이었지만 어찌 평범한 한 여자로서의 가정적 삶에 대한 동경이 없었으랴?

시간만 나면 시골집으로 내려와 자신의 조카인 나의 아이들에게 지극정성을 쏟아붓는 것만 봐도 동생의 마음을 난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러한 동생 덕분에 난 사실 나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철마다 조카들 입힐 옷이며, 먹일 우유, 장난감... 심지어는 양말 장갑, 학교 들어갈 때 책가방을 비롯한 각종 학용품 까지도 사서 보내주곤 했었다.

아들 하나 딸 둘, 나의 아이들 셋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여동생 몫이었다.

2001년 추석, 동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어머님을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의 선물을 푸짐하게 챙겨서 고향집을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더욱 값진 선물인 결혼 상대자와 함께 와서 나와 어머니께 인사를 시켰다.

동생이 소개하는 결혼 상대자인 그는 큰 오빠인 나보다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를 본 나의 첫인상은 심성은 고와 보이나 진실성이나 결단력이 부족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보였다.

"나이 따위가 무순 상관이랴! 그리고 처음부터 모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부족한 것은 살면서 채워나가면 되겠지.. 동생을 행복하게만 해줄 수 있다면....”

그럼 먼저 혼인 신고라도 해두지

내가 권유하자 동생이 나섰다.

오빠, 혼인신고는 정식으로 식을 올리고 난 뒤 당당하게 하기로 했어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나중에 아내를 통해 들었는데 그(동생의 남자)는 서울의 모 은행 과장으로 현재 이혼을 했고, 동생은 그 은행 단골 고객으로서 몇 번 만나다 보니 커피도 나누게 되었으며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로 발전하여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이가 나이 인지라 식을 올리기 전에 살림을 먼저 차리게 되었다.

동생의 결혼식을 빨리 올려줘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나의 뇌리를 억누르고 있던 2002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가에서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며칠 만에 뵈러 갔는데 지금 서울에 있어야 할 동생이 집에 와 있었다.

웬일이냐?”

그냥 시간도 나고 엄마 보러 왔어요

동생은 조금 어색한 투로 대답을 하며 말꼬리를 삼켰다.

그런 동생의 말투가 왠지 석연치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동생의 집에 내려오는 횟수가 빈번해지더니 그해 초겨울 동생은 아예

집을 영광읍으로 옮겨버렸다. 아파트 한 채를 전세 얻어서....

동생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동생의 남자가 자기 친구에게 부정 대출을 해 준 것이 발각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지금까지 모아둔 재산마저 모두 압류당하게 되었는데 간신히 아파트 전셋값 정도 챙겨서 영광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참으로 암담한 일이었다.

걱정 마라 사람이 사는 일인데 어떻게든 길이 열리겠지"

나는 시쳇말로나마 동생을 위로할 수밖에 달리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저작권자 © 영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