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군민들의 역량강화와 지역사회의 성장을 돕기 위해 진행하는 영광 미래 리더스 아카데미가 영광신문 지면을 통해 찾아왔다. <편집자 주>

 

13오월춘추의 기다림들

영광리더스아카데미 김영수 원장
영광리더스아카데미 김영수 원장

 

부자 그리고 와신상담

애플 tv의 드라마 와신상담
애플 tv의 드라마 와신상담

臥薪嘗膽(와신상담)이란? [:누울 와, :섶나무 신, :맛볼 상, :쓸개 담]이며 장작 위에 누워서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의 한자성어. 복수나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가오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춘추시대, 양쯔강 하류에 서로 적대적인 오나라와 월나라가 맞닿아 있었다. 서로 적대적인데다가, 양국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초나라의 수도를 오나라가 정복하고 그들을 거의 멸망시킬 뻔한 일들 등 때문에(진나라()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멸망은 모면함) 강국이 자신들의(초나라) 바로 밑에 있는 것을 꺼렸기에, 월나라더러 오나라를 치도록 사주하여 그들은 항상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월왕 구천이 병법의 대가인 손무가 오를 떠나고, 오왕 합려가 주색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계획을 세워 오를 공격했다. 이 전쟁으로 오왕 합려와 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오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둘째 왕자 부차는 오왕이 되어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매일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부하들 더러 인사 대신에 구천에게 원수 갚을 것을 각인시키도록 했다. 그렇게 오자서 등의 도움으로 수년간 복수를 다짐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끝에, 오나라는 월군을 몰살시키고 월왕 구천을 생포해 오국으로 압송, 합려의 묘지기 일을 보고 왕후와 함께 삭발시키는 등 치욕을 주고, 월나라를 철저히 파괴하고 돌아갔다.

그 수 년 후, 구천은 오자서가 자신의 복수 의지를 알아채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부차의 신임을 얻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초나라를 경유해 월나라로 돌아가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구천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밖으로는 부차에게 경국지색이라고도 불리는 서시를 보내고, 온갖 진귀한 조공품이며 군대를 지원해 주는 등 진실한 신하로 보여서 20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부차가 제나라와 초 양강을 굴복시키고 마침 또 다른 중원의 강국 진()을 굴복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틈을 타 오국을 기습, 라오허 산에서 화공과 수전의 대승으로 오나라를 패배시켰다. 이후 구천은 부차를 죽이고 오국을 합병하였다.

이 고사로부터 와신상담은 장작에 누워 복수를 다짐하고 곰의 쓸개를 핥으며 노력해서 고난을 이겨낸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와신상담의 주인공 구천

구천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제35대 군주이자, 2대 왕. 범려의 보좌를 받아 오나라를 멸했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고발합려에게 승리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 아버지 미윤상(羋允常)이 사망하자 태자 미구천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이때 복상 중이었는데, 미윤상의 부고를 알게 된 오왕 고발합려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미구천은 결사대를 구성하여 맞서 싸우면서 집단 자살을 시켰고, 눈앞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집단 자살쇼에 오나라 군인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틈을 타 본대로 기습을 가했다. 이 계책으로 취리(檇李)에서 오나라 군대는 월나라 군에게 대패하고, 고발합려는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어 이로 인해 진중에서 죽는다.

 

고발부차에게 패배

월왕 구천 3(기원전 494), 오나라에서 태자 고발부차가 오왕으로 즉위했으며, 오운의 보좌를 받아 오나라를 부흥시키고, 고발부차는 미구천에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구천은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석매를 보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대패하여 오히려 월나라의 도읍이 포위되고 말았다. 부초 전투에서 크게 패한 미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미구천은 범려의 진언에 따라 고발부차에게 항복하며 고발부차는 이를 받아들였다. 중신 오운이 자기 사례로 인간의 복수심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범려가 간신 백비에게 뇌물을 써서 백비를 통해 고발부차를 회유했기 때문에 미구천은 항복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

그러나, 왕이었던 미구천은 오나라에서 고발부차의 노비 노릇을 하게 되었다. 몇 년간 치욕을 겪다가 범려의 공작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사기에는 미구천이 아닌 범려가 잡혀갔다고 적혀있다. 그마저도 2년 후에 풀어주었다고 하며, 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은 열국지인데, 열국지는 정사가 아닌 소설이다. 즉 와신은 정사지만 상담은 소설이라는 것. 심지어 열국지의 출처가 되는 춘추좌씨전에도 고발부차에게 잡혀가서 쓸개를 핥았다는 말은 없다.

미디어에서는 미구천의 아내가 부차의 첩 노릇을 하기도 한다.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발부차가 병이 들자 범려의 간언을 듣고 고발부차의 똥을 핥았다. 미구천이 고발부차의 마부 노릇을 한 적도 있다. 복수의 칼을 갈며 월나라를 부흥시킨다.

월왕 구천 7(기원전 487), 범려의 공작으로 겨우 월나라로 돌아온 미구천은 겉으로는 고발부차에게 복속된 척 하면서 은밀하게 오나라의 국력을 악화시키고 월나라의 국력을 키우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매일 쓰디 쓴 쓸개를 핥아먹으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자식을 많이 낳은 집에는 세금을 덜 내거나 면제하는 등 출산과 결혼을 장려했다. 나이든 여자가 젊은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등, 결혼 통제 정책을 펼쳤다. 범려의 계책에 따라 고발부차에게 재물과 미녀 시이광을 보내서 부차가 국사에 전념하지 않고 쾌락에 빠지게 만들었다.

구천이 복수를 위해 직접 만든 월왕 구천검
구천이 복수를 위해 직접 만든 월왕 구천검

 

 

월나라의 역습과 오나라의 멸망

고발부차는 시이광과의 향락에 빠졌으며, 간신 백비의 말을 듣고, 명신 오운이 자살하도록 만드는 등. 오나라의 정치는 혼미해졌다.

결국 고발부차가 중원의 회맹에 나갔을 때를 노리고 미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했다. 고발부차는 당황하여 오나라로 되돌아와서 황급히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고발부차는 미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 약해진 미구천은 순간 망설였지만 범려가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에 자신을 살려줬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는지 백호의 장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한다. 고발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운을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채 자결했으며 오나라는 멸망했다. 한때 패자의 위세를 떨치던 강성한 오나라는 고작 몇년 만에 허무하게 멸망하였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미구천은 중원의 제후들과 회맹을 하고 패자가 되었다.

진시황이 일왕구천검을 찾아 파낸 검지 ; 합려묘
진시황이 일왕구천검을 찾아 파낸 검지 ; 합려묘

 

 

 

 

강의를 마치며

구천은 한자문화권에서는 고난과 복수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군주가 고난을 겪을 때 신하들이 미구천을 언급하면서 위로하는 것은 거의 역대급 인물이다.

하지만 정치가 워낙 혹독하고 잔인했으며, 말년에는 그 자신이 고난과 복수를 함께한 명신들을 신뢰하지 못해 숙청해버렸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게다가 천하통일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오나라 하나만을 멸망시켰을 뿐인데 성급하게 유능한 대신들이 토사구팽에 들어섰다는 점도 거론되면서 원대한 포부를 가지지 못했다고 평가 받는다. 적어도 비교대상인 고발부차는 제나라 정벌을 진행하고 회맹에 끼여들어 패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확실하게 내비쳤으니 포부만은 미구천보다는 컸던 셈이다. 실제로 월나라는 미구천 이후로 그 국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채 소극적으로 행동하다 내분으로 점점 약해지고 결국 국력을 회복한 초나라에게 허망하게 멸망하고 만다.

1. 현문(抉目 縣門)

눈알을 파서 문에 걸어라라는 무시무시한 말이지만 그 뜻은 오자서가 부차에게 배신을 당해 자결하기에 앞서 남긴 유언으로, 토사구팽 당하지 않기 위한 리더의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2. 비조진 양궁장(蜚鳥盡 良弓藏) 교토사 주구팽(狡兔死 走狗烹)

제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친구 문종을 염려하여 했던 말로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동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을 하도록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의 반역에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게 된다.

그래서 리더는 거할 때와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형진 시민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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