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연/ 전 한국언론재단 상임이사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요즘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지난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사용한 메시지다.
세월을 뛰어 넘어 새삼 그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보는 새해이다.
사람의 향기가 갈수록 사라져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주위에 더욱 많아졌다. 매일 전투병과 군인들처럼 싸우는 정치권, 그리고 얼마 전 서울 신림역과 분당 서현역의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에서 보듯 사회에 분노가 넘쳐난다. 그래서일까, 스포츠 팬들이 그것도 광(狂)팬들이 많아졌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을 비롯 김하성,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갓 입단한 이정후의 스토리 하나하나가 술안주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포츠 얘기를 나눌 때만 우리사회를 숨 막히게 하는 ‘너는 너, 나는 나’ 이분법이 조금은 사라진다.
매년 전국 교수들이 정리하는 사회 메시지가 있다. 이른바 올해의 사자성어다. 2023년은 ‘견리망의’(見利忘義)로 우리사회 현상을 진단했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탐욕의 속물성을 꼽았다.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편의 이익에만 골몰한 한 해였다는 비판이다. 국정운영 전반에서도 이런 모습은 비일비재했다.
“국가백년지대계를 생각하는 의로운 정치보다는 눈앞의 출세와 권력이라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편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한 경우로 의심되는 사례가 많다”
윤석열정부 집권 2년차에 나타난 모습이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교수들이 진단한 과거 정권, 집권 2년차 사자성어는 어떤 내용들이었을까.
2009년 이명박정부 집권 2년차는 방기곡경(旁岐曲逕)으로 ‘일을 정당하고 순탄하게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한다’라고 비판했다.
2014년 박근혜정부 모습은 지록위마(指鹿爲馬). 진실과 거짓을 제멋대로 조작하고 속였다고 통렬히 질타했다.
2018년 문재인정부는 임중도원(任重道遠).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촛불 정부 2년차의 책무를 엄중하게 일깨워 준 것이었다.
정치가 과연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할까?
역사가 시작한 이래 무수한 사람들이 묻고 또 묻는 난제의 화두 중 하나다.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정치 관련 이론과 글들은 이를 말해준다. 그만큼 정치는 한 국가 사회의 통합과 질서, 전체 자원 배분과 관련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고려 조선과 같은 왕조시대에서는 언제나 지배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왕권과 백성을 대변하는 신하들의 신권이 충돌했다. 왕권과 신권이 균형성을 이룬 시기에만 평화가 가능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보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근간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영역에서 일을 하든지 기회균등과 능력발휘가 보장 보호된다. 자유와 권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며 후대들의 행복은 물론 세계평화에도 기여하는 공존, 공영이 강조되고 있다.
이를 실현 하는데는 정치영역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역대 집권 2년차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교수들의 사자성어를 보면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방기곡경, 지록위마를 보면 그 어느 곳에서도 헌법 전문 정신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 기능의 실종이다.
정치에서 헌법 정신과 민주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가치 실현은 불가능한 것일까? 정치와 정의는 서로 접목할 수 없는 상극일까?
정의(正義)의 사전적 개념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다.
이 사전적 정의 개념을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눠 실현을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먼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차원의 정의는 ‘공정성’만 갖추면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의 정의 실현은 또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도 진리의 개념이 사회적 합의 하에 올바르게 정의되는 것이 관건이다. 또 실현 주체가 바르고 잘 교육되어야 하는 문제도 따른다.
이러한 두 가지 생각의 관점에 있어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적어도 건전한 이성과 상식이 살아 있어야 하고 양심이 숨 쉬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에서 건전한 이성과 상식이 살아 있다면, 양심이 숨 쉰다면 ‘견리망의’는 낯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정치는 그래서 비이성적이고 폭력의 정치다.
정치인들 가운데 정의를 가지고 끊임없이 고민한 사람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김구 선생을 생각하면서 왜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만한 사람은 패배자밖에 없을까?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해 ‘정의’를 가지고 역사를 일군 사람, ‘정의가 승리한다’는 역사적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만난 사람은 링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상 ‘정의’로운 가치를 국정운영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추구한 인물로 링컨을 맨 앞에 꼽는 걸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내내 내외의 적들로부터 시달렸다. 소속당 의원들은 물론 그가 임명한 각료들로 부터서도 공격을 받았다. 대통령으로서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정당성을 내세워 그는 늘 반대자들과 논쟁하고, 타협하고, 양보하고, 설득하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힘으로 그들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머리맡에 두고 읽은 성경말씀에 뿌리를 둔 ‘정의’실현과 이를 토대로 한 노예해방 등 역사발전을 신념으로 지켜나갔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끝냈을 때도 그는 승리를 말하지 않고 국민 화합에 주력했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희망을 심어준 링컨-.
이런 링컨을 발견하고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란 책까지 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첫 국정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대통령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는 이상 더 없을 것입니다. 국가정보원·검찰·경찰·국세청, 이른바 ‘권력기관’을 더 이상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들 권력기관을 국민 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이제 권력을 위한 권력기관은 국민을 위한 봉사기관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국민들에게 돌려준 권력을 다시 거둬들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심기 경호’ 정치로까지 발전시켰다.
정치란 과연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는 것일까?
‘정치가 주는 행복이 솔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풍토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 다시 물어진다.
따지고 보면 정치가 우리 삶 전부를 지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독재정권 치하에서는 전부일 수 있지만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정치에서는 아니다.
전통 회화의 최후의 거장이라고 불리운 의재 허백련은 60이 되어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도(道)를 호로 삼고 세상과 소통했다. 의도인(毅道人)이 그것이다.
우리 정치권도 2024년에는 바른 정치의 길을 찾는 소통의 손바닥 정치가 나와야 한다. 매일 전쟁터처럼 싸우는 정치가 아니라 소통의 질서를 지키는 편안한 국민 체감형 손바닥 정치다. 손바닥 정치에서 국민들의 손바닥 행복도 나온다.
“나를 찍어라! / 그럼, 난, / 네 도낏날에 / 향기를 묻혀주마!”
이산하 시인의 ‘나무’란 시다. 이 시가 주는 역설처럼 사람의 향기가 나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윤석열정부도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권력기관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일까. 헌법 제1조 2항에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정의되어 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정연
전)전남일보 편집국장/논설실장
전)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전) 광주전남연구원 이사
전)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지원포럼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