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광신대학교 복지상담융합학부 교수

김철진 광신대학교 복지상담융합학부 교수
김철진 광신대학교 복지상담융합학부 교수

지난호에 논의했던 최흥종을 통하여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위치를 '복음적'이라는 단어와 '사회봉사'라는 단어로 연결시켜 보면 더 의미가 있다.

최흥종은 삼일 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 당시에 평양신학교에 재학하면서 광주중앙교회를 개척하고 있었고 깊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최흥종은 삼일운동 때 광주북문안교회(, 광주제일교회) 교인 및 지역인사들과 광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당시 최흥종은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석차 상경해서 전라남도 지역에 뿌려질 독립선언문을 받아서 광주로 내려가기 위해 인력거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던 중 자신이 중요한 문서를 소지한 것도 잊은 채, 남대문 일대에서 있었던 독립시위를 보고 인력거 위에서 조선독립이라 쓴 깃발을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고 이를 계기로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한바 있다. 그래서 광주와 전라도에는 기미독립선언문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일운동에서 최흥종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그런 순박한 열정은 광주가 삼일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광주 삼일운동에서 최흥종이 빠지지 않는 것은 북문안교회와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일운동을 향토사에서 보면 광주에서는 31일이 아닌 310일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1919년의 통신과 교통수단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후 광주는 단독으로 192911월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지난 2019년 본보의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기사에서 필자가 거론했던 바와 같이 영광의 삼일운동은 310일의 광주에 이어 광주·전남권에서 두 번째로 14일에 전개되었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곧바로 삼일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강인한 의향정신이 영광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찍부터 최흥종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계의 영향으로 우리 지역에서는 위계후 · 조철현 등과 같이 신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자각한 인물들의 주도 속에서 적극 전개될 수 있었다. 이들은 삼일운동을 통해 새로운 항일운동 주도층으로 대두하여 1920년대 이후 영광의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영광에 있어 314일과 15일의 만세운동은 최초의 점화단계이자 단시간에 최고조에 달했던 지역적 성격을 지닌다.

시위 운동을 대규모로 확산시키는 데는 기독교계의 힘이 컸다. 앞의 청년 학생 가운데도 기독교 신도가 적지 않았고 적지 않았지만, 교회 차원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우리 지역에서는 설립 119년이 되는 교회로서 한국교회 역사의 초창기 기억부터 소중히 간직한 영광대교회가 삼일운동 참여교회(100주년 기념)로 한국 기독교(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우리 지역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한편 최흥종은 사전에 체포되었지만 광주 만세운동 모의에 함구한 것을 당시 광주의 인사들은 고마워했고, 광주의 삼일만세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최흥종은 19203월 감형후 평양신학교로 가서 복학하였고 바로 광주청년회와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였다(1924). 그해 12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11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광주중앙교회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후에는 시베리아(1927)와 제주도 모슬포 지역(1929)에 선교사, 목사로 활동하였다.

19317월 사직하고 이후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를 창립하면서 구라사업(救癩事業)과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였다. 그가 광주를 떠난 사이에 최흥종이 기부해서 설립된 봉선동의 한센병 환자 치료시설인 광주 나병원은 시민들의 항의로 여수로 이전하여 '여수 애양원'이 되었다.

최흥종은 엘리자베스 쉐핑(한국명 서서평)과 협의하여 한센인 집단 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을 만들어 줄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기 위해 1932년 나환자를 이끌고 이른바 구라행진으로 총독부 앞마당까지 들어가 총독 면담을 요구하여 소록도에 나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게 바로 고흥 소록도의 나환자 시설의 시작인 것이다.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무너지는 교단이 속출하자 세브란스 병원의 지인을 통해 거세한 후 호를 오방이라 짓고 자신의 보고를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냈다. 그후 국채보상운동, 나환자구원, 삼일만세운동, 야학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금연과 금주운동, 공창폐지, 신간회등등을 하고 1966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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