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베이컨(3)
그러나 프란시스 베이컨(영국의 철학자)의 출세는 돈 뭉치를 뿌리는 그의 처세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은 당시 궁정에서 요청되었던 네 가지 기본적인 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사기, 위선, 아첨, 그리고 철면피. 이것이 궁중의 은총을 얻는 네 가지 비결. 만일 이것이 싫거든 귀족도, 평민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이와 관련하여,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모부에게 베이컨이 보낸 편지가 있다. “설령 각하께서 저를 기용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깊은 곳에 놓인 진리의 광맥을 뒤지는 참된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과연 이 말이 진실일까? 그는 진심에서 이런 말을 했을까? 과연 그는 진리를 위해 부와 명예와 권력을 포기할 수 있는 인물이었을까? 그 속이야 어떻든, 당시의 분위기에 휩싸여 돈을 뿌려대던 베이컨은 결국 대법관이 된 지 3년 만에,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은 어떤 소송인에 의해 뇌물수수죄로 고소를 당한다. 의회로부터 소환되어 심문을 당할 때, 그는 수수(收受) 사실 자체는 그대로 인정했다. 결국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공직을 박탈당한 채, 템스 강 북쪽 기슭에 있는 런던탑(한 때는 감옥으로, 한때는 왕립 보물창고로도 사용됨. 지금은 박물관으로 관광명소가 되어 있음. 이 안에는 감옥으로 쓰이던 때의 고문기구나 단두대도 들어있음)에 감금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재판관이 법정의 피고인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은 나쁜 관례 가운데 하나였다. 베이컨은 이 점에서 시대를 초월하지 못했다. 그러나 4일 후에 왕의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4만 파운드의 벌금도 면제받았다. 그렇다면, 당시 왕과 베이컨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러한 밀월 관계가 왜 깨진 걸까?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공공연하게 금품을 받아 챙겼던 베이컨은 그 무렵, 20여 건의 부패 혐의로 의회의 탄핵을 받고 기소당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당시의 영국은 왕실과 의회의 대립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므로 평소에 왕실의 특권을 앞장서 옹호해왔던 베이컨은 의회의 공격 목표가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왕 역시 더 이상 그를 보호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석방된 베이컨은 고향의 옛집으로 옮겨갔고, 이후로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했다. 얼마 후에는 국왕으로부터 다시 정계에 복귀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러던 중, 1626년 3월 런던에서 하이게이트로 가는 길에서 ‘과연 고기를 눈(雪)속에 묻어두면, 얼마 동안이나 썩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는 즉시 어떤 농가에 들어가 닭 한 마리를 사서는 배를 가른 다음, 털을 뽑아서 눈 속에 묻었다. 그러는 동안 온몸에 피로와 오한이 몰려들었다. 그는 결국 가까운 아런델 경의 저택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5세 때였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실험은 훌륭하게 성공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베이컨의 삶은 불우했다. 빚에 시달려야 했고,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사실상 이혼 상태가 되었으며,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갔다. 그가 남긴 재산은 7천 파운드였고, 빚은 2만2천 파운드였다. 유산보다 부채가 훨씬 더 많았던 셈이다.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최근 저서『고집불통 철학자들』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