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베이컨(4)
앞서 살펴본 내용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은 프란시스 베이컨을 ‘권력욕에 사로잡힌 철학자’의 대명사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입신출세를 향한 그의 행태가 실제로는 필생의 목표인 6부작 『학문의 대혁신』을 완성하고,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둔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어떻든 정치에 대한 야망과 학자로서의 욕망 사이에서 늘 방황해야 했던 베이컨이 오래도록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은 것은 결국 학문에서 이룩한 업적 때문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36세 때에 『수상록(隨想錄)』(그때그때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을 적은 글)을 출간하여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는데, 이 수필집은 실로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주요 작품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맥베스』 등이 있음)가 실제로는 베이컨이었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 학계에서조차 “문학천재 셰익스피어가 시골뜨기 출신 청년이었을 리 없다”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위, 옥스퍼드 백작 등이 진짜 셰익스피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이 세계에서 영어로 쓰인 작품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장갑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교육조차 받지 않은 그가 과연 주옥같은 작품들을 혼자 집필했을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에 대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 자체가 가짜이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숨겨진 아들로 추정되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작품 활동을 했는데, 그 이름이 셰익스피어였다”는 설이 있다. 또 “대문호들의 비밀 창작클럽의 이름이 셰익스피어였고, 그 이름으로 계속 책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근거로는 우선 셰익스피어의 일대기(一代記) 자체가 매우 불확실한 데다,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와 문장력, 글의 수준 등이 셰익스피어로 거론되는 사람의 교육 수준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사실 등이 들먹여진다. 그래서 당시 왕자(王子) 수준으로 교육을 받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바로 그(셰익스피어)라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추측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사생아(私生兒)였다는 소문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이 내용을 정리해보면, “평생 독신으로 지내 ‘영국과 결혼했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엘리자베스 1세는 사생아를 몇 명 낳았는데, 1548년 비밀리에 낳은 첫 사생아가 바로 셰익스피어이다”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여왕은 그를 낳은 후 귀족 부부에게 양육을 맡겼는데, 셰익스피어 역시 이러한 출생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극 『햄릿』과 소네트(Sonnet, 주로 사랑의 주제를 다루는, 서정시) 등의 작품에 이런 내용을 반영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여왕이 한 궁정 신하와 로맨스를 가진 뒤, 임신과 출산 때문에 한동안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었다”고까지 주장한다.
만약 위의 주장대로, 셰익스피어가 여왕의 아들이고 셰익스피어가 베이컨과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면, “베이컨이 여왕의 아들이다”라는 설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들은 현재까지 증명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묻혀 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베이컨 끝- <최근 저서 ‘고집불통 철학자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