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하이데거(2)

하이데거의 저서존재와 시간은 기존의 철학에 대해 강력한 철퇴를 가했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사유를 향해 돌파구를 연 그는 현상학의 거장인 후설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의 사상을 완성하였고, 후설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33년에는 43세의 나이로 동 대학의 총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때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도록 하자.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 사회주의당, 일명 나치(Nazi)의 지지 기반은 기존 정당 및 노조에 불만을 품은 중간층과 실업자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에 위협을 느낀 경영자 단체의 도움을 받아 풍부한 자금으로 선전 활동을 시작하면서, 선거를 통한 정권의 쟁취를 꾀하였다. 1932년에 제1당이 되고, 1933년에 재계와 군부의 지지 아래 무려 288석을 얻음으로써 히틀러 정권을 출범시켰다. 바로 이것이 나치 만행의 씨앗이 될 줄이야.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홀로코스트(‘신에게 동물을 태워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당이 독일과 점령지 여러 곳에 약 4만여 개의 집단 시설을 세우고, 유태인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사망자 가운데 유태인은 약 6백만여 명으로, 당시 유럽에 살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수감자들은 각종 작업에 동원되어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病死)하였다. 동유럽에서는 특별행동 부대라는 불법 무장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치 학살의 잔인성 가운데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 실험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이 중에는 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 실험이 있었다. 실험을 통과하여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즉시 죽임을 당한 후, 배가 갈라졌다.

결국 그 여파는 대학에까지 뻗쳐왔으니. 45일자로 취임한 폰 묄렌도르프 총장은 반() 유대주의 내용이 적힌 플랑카드(현수막)를 교내에 걸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교육부에서는 그 즉시 총장을 파면조치하고 만다. 통보를 받은 묄렌도르프는 곧바로 대학 동료이자 저명한 철학교수인 하이데거를 찾아가 차기 총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당의 간부가 총장에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한 하이데거는 421, 대학 평의회의 만장일치에 의해 신임 총장에 선출된다. 하이데거는 독일 대학의 자기 주장이라는 제목의 총장 취임 연설에서, 학생들에게 ‘3대 봉사’, 즉 지식추구 외에 노동과 군사 훈련에도 동참할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곧이어 나치 간부인 프라이부르크 시장과 당원들이 찾아와 입당을 권유하자, ‘당직을 맡지 않고, 당을 위해 활동하지도 않는다.’는 조건으로 입당을 결행한다. 이리하여 193351,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 나치 당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떻든 형식적으로나마 하이데거가 나치에 협력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아내가 히틀러의 저서나의 투쟁을 읽도록 권유한 것이 들어 맞았을까? 물론 그런 설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하여 하이데거가 골수 나치인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나치에 저항한 영웅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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