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하이데거(3)
(하이데거가 나찌에 입당하긴 했으되, 그가 나찌의 골수당원인 것도, 그렇다고 나찌에 저항한 영웅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일이 있었다.『존재와 시간』의 초판에는 스승 후설(유대인)에게 바치는 헌사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헌사가 출판사에 의해 삭제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출판사의 그런 행위를 묵인하고 말았던 바, 이것은 그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나치에 저항한 흔적도 눈에 띈다. 가령 하이데거는 반(反)유대주의 현수막을 내걸거나 유대인 저자들의 책을 도서관에서 퇴출시키려는 행위는 금지시켰다. 나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고, 이로써 양측의 갈등은 점차 첨예화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불과 10개월 만인 1934년 2월, 자진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나고 만다.
총장 퇴임 이후 15년여 동안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정권으로부터는 불순분자로 취급되었고, 교내에서는 ‘쓸모없는 교수’로 분류되었다. 더욱이 50대의 나이에 라인 강변에서 참호를 쌓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라인 강 저편의 스위스 바젤에서는 신학자 칼 바르트가 역시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호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강의 때마다 “히틀러 만세!”를 외쳐야 한다는 지시를 거부하다가 독일에서 추방당했고, 모국인 스위스로 돌아가 육군에 입대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철학계와 신학계를 대표하는 두 사상가는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의 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 정부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던 하이데거는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군정 치하에서는 정반대로 ‘나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강의가 금지되었다.
그가 복권되어 강단에 돌아온 것은 1951년 9월이었고, 명예교수로 물러난 것은 그 다음 해의 일이었다. 그 후로 하이데거는 현실적인 정치와 완전히 담을 쌓고, 강연과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만년에 가서는 모든 공직생활에서 물러나 아주 가까운 동료들의 모임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하이데거의 사상사적 위업(偉業)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나치 덕분에 개인적 영달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1976년에 사망할 때까지 철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이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던 것은 일견 당연하다. 나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하이데거를 변호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그의 전기를 쓴 비멜 교수(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는 “이 과오가 인간적인 실수에서 나온 것이지, 그 자신의 사상(철학)의 결과는 아니다.”라고 변호했다.
하지만 나치정권 치하에서 있었던 총장 취임은 그의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 지울 수 없는 티로 남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여성철학자 한나 아랜트는 이러한 그의 과오를 “시실리 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의 스승이 되었던 플라톤의 과오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평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해 디오니소스에게 다가가, 그의 정치고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노예로 팔리고 말았다.
유대계 출신인 한나 아렌트는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자신의 스승인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졌던 인물이다. 물론 유부남이자 17살이나 연상이었던 하이데거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하였지만, 훗날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없었다면,『존재와 시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유튜브 ‘강성률 철학 티비’ 운영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