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달인들-하이데거(4)

어떻든 나치정권 치하에서 있었던 총장 취임은 하이데거의 학문적 권위와 명예에 지울 수 없는 티로 남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여성철학자 한나 아랜트(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 스승 하이데거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음)는 이러한 그의 과오를 시칠리아 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의 스승이 되었던 플라톤의 과오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평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 국가실현을 위해 당시 시칠리아의 군주 디오니소스에게 다가가, 그의 정치고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노예로 팔리고 말았다. 나중에 해방되어 고향인 아테네로 돌아와 인류 최초의 대학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제자 양성에 온힘을 다하며 저서 집필에 몰두하던 플라톤은 기원전 357, 다시 디오니소스의 간청을 받는다. 한동안 망설이던 플라톤은 다시 시칠리아로 향한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깨달아 1년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1980년대에 들어와, 하이데거가 일종의 확신범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 독일 민족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치즘에서 발견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나치즘에 동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치의 만행 특히 유대인 대량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인종 차별주의에 동조하는 독일 사회의 구조적인 에 따른 범죄였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유태인 역사학자 미셸 베렌바움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 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대학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 실험을 자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 계약권을 따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또한 독일 IBM 지사의 천공카드(일정한 자리구멍내어, 숫자글자기호나타내는 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물론 하이데거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치즘에 가입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치즘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 자신은 나치즘의 광기(狂氣)를 나의 철학으로 교화시켜, 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지 몰라도,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야스퍼스가 히틀러를 교양이라곤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했을 때, 하이데거는 그게 뭐 중요하냐?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의 손을 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히틀러의 그 우아한 손만 보고 그 손에 묻은 피를 보지 못했다고 하는, 또는 못 본 척 했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최대 실수가 아니었을까? -다음호에 하이데거 5-(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유튜브 강성률 철학 티비운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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