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영광군의 군수 재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후보가 조금씩 드러나며 군민의 설평(舌評)도 시작되고 있다. 각자의 능력과 사람 됨을 저울질하지만, 그보다 훨씬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건 개인적 인연이다. 도시와는 달리 지역선거의 특성은 지연과 혈연 그리고 학연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패가 갈리고 심지어 친구가 등을 돌리기도 한다. 나와 뜻이 다르면 옳지 않다는 절대적 신념이다. 지역의 지도자를 뽑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평생 인과 관계까지 버릴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이장 선거로 인해 동네가 갈라지는 경우도 보았다.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개념이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이 표면으로 올라온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요즘 국회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치권에서 양보와 타협이란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다. 일국의 대통령이 소통의 문에 빗장을 걸고 자신을 반대하는 6할의 국민과 이들이 추대한 야당의 정치인을 배척하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젊은이가 군에서 사망을 해도 원인 밝히기를 거부하는 대통령과 여당이 뻔뻔하게 존재하는 대한민국이 과연 정상인지 묻고 싶다. 이를 밝히기 위해 수사를 하던 사람과 이를 덮으려 하는 무리의 옳고 그름의 평가가 여론이라는 방식으로 강력하게 목을 조여도 전혀 개의치 않는 불감증은 절대적인 공감 부족 현상이다. 국민의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부류의 정치는 그래서 힘들고 아프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고 하지만 역사 속의 결과는 반드시 그렇지만 않다는 사실 또한 존재한다. 거짓은 여론의 바다에서 바로 떠오르지만, 진실의 부상(浮上)은 더디고 때로는 영원히 가라앉고 만다. 정치인의 마음속에서 기생하는 악마는 눈 어두운 국민의 호응으로 때로는 여론의 애완견 같은 이권 바라기 충성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이권 챙기기에 몰두한다. 여기에 양심은 없으며 수오지심도 없다. 법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수단이 되고 권력은 방법이 된다. 이렇게 병사의 죽음에서 책임은 사라지고 정의롭던 수사관은 항명죄라는 이름 아래에서 재판에 넘겨져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무도(無道)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대통령 탄핵을 원하는 청원이 100만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이는 또 다른 100만의 횃불이 되어 정의를 아는 국민의 가슴에서 다시 타오르고 있다. 지도자의 도를 모르는 지도자는 자리를 지킬 자격이 없다. 최말단의 일개 군수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현실이다. 국민과의 공감대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는 지도자는 서민의 아픔을 보듬지 못한다. 그래서 부자 감세에만 진심이고 서민을 위한 단돈 25만 원은 절대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넉넉한 인품을 위해선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의 채무를 갚아주고 전쟁 중인 나라에 가서는 40년 상환의 거액을 가볍게 던져주기도 한다. 의리를 지키는 방법은 ‘내 사람 지키기’를 통해 강하게 나타나고 수시로 격노(激怒)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민을 위한 격노는 아직 없다. 대한민국이 대통령이라는 절대적인 지도자 덕에 매일 말벌집을 건드려 놓은 형국이다. 노자는 지도자의 덕목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가장 좋은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고, 다음 단계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가깝게 여기고 기리며, 그다음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마지막 단계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경멸하는 통치자다.” 우리는 현재 어디일까. 검찰 정권으로 인해 두렵던 정권이 어느 순간부터 우스워지고 있지는 않은가. 대통령의 능력이 일개 필부인 자신과 비교의 대상이 되었을 때 가장 적절한 단어는 ‘경멸’이다. 대통령의 일본관이 작동되어 여당은 ‘한미일 군사동맹’을 외치고 군사 전문가인 국회의원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제발 그만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