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자녀(2)
지난 호에서 자녀를 갖지 않거나 육체를 경멸한 철학자에 대해 살펴보았거니와 과연 소크라테스는 어땠을까? 그 역시 ‘육체란 영혼의 무덤’이라고 하는 피타고라스의 사상에 동조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참된 철학자들에게 육체가 방해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영혼이 육체적 욕망이나 감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진리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육체에서 생겨난 자녀들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는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젊은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까지 두었던 소크라테스로서, 자식들을 보살피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에 좋은 아버지란 없다.’고 힘주어 말한 사르트르가 보봐르 부인과 계약결혼을 하여 끝내 자식을 낳지 않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독신으로 평생을 살다간 칸트, 스피노자, 쇼펜하우어를 포함하여 사도 바울도 혹시 그런 부담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성경에는 여자들과 백성을 향해 예수가 충고한 내용이 나온다.
“예수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누가복음」 23장 28절~30절)
자녀를 두지 않는 것이 부모만 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터, 특히 어려운 때에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계산이 그 속에 들어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험한 꼴 보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태어나지 않은 편이 더 나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녀가 부모에게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한 것은 아닐 터. 세상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 때문에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들로 인하여 힘과 위로를 받는다.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그들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자식을 많이 둔 사람의 복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壯士)의 수중(手中)의 화살 같으니/이것이 그의 화살 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시편」 127편)
젊을 때에나 늙을 때에나 자식은 최대의 기쁨이요 자랑거리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려 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누가복음」 11:13 전반부)
하찮은 미물도 자기 새끼에게만큼은 지극 정성을 다하는데, 하물며 사람인 바에야 두말한 나위가 없다. 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라도 부모는 자식 때문에 힘을 얻는다. 자식 때문에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위해, 그 자식의 장래를 위해 땀 흘리고 일하며, 어떠한 고통도 달게 받는다. 심지어 ‘자식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라. 이미 그는 부모에게 다 주었다.’는 말도 있다. 자식이 커가면서 부리는 재롱이나 그들이 제공하는 기쁨 등을 통해 부모는 이미 받을 만큼 받았다는 뜻이리라. 자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의 삶이 허락된 생명은 생명 그 자체로서 고귀하며, 따라서 끝까지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특히 ‘아이 낳는 일’이 애국이요 효도요 ‘사회에 대한 공헌’이 된 오늘날, 제발 많은 자녀들 낳기를! (영광백수 출신,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유튜브 ‘강성률 철학 티비’ 운영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