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꿈in방사회복지교육문화연구소 이사장

김철진 꿈in방사회복지교육문화연구소 이사장 
김철진 꿈in방사회복지교육문화연구소 이사장 

한국 역사에서 20세기는 식민지, 남북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앙은 한국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었으며, 오늘날 기독교는 한국 민족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하게 되었다. 지난 한 세기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는 정치적 상황의 한복판에 서서 선교활동을 전개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회 정치적 기능에서 볼 때 기독교는 한국인의 고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영광의 기독교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민족의식이 강하고 자발적인 의지를 가진 지역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무령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영광대교회(since 1905)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때는 지역사회에서 외부와의 정보교환을 위한 거점 및 연락망의 역할, 지역민들을 위한 근대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간이학교 및 주일학교 운영 그리고 부흥회 및 사경회 개최, 민족문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지역민들의 본보기 역할 등을 했다. 이와 같이 지역사회에서 영광대교회 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 예가 바로 일제 강점기 때 영광대교회의 조사(助事, helper)(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직분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선교초기에 한국인 목사가 양성되지 못할 때 선교사들을 도와서 전도, 치리, 순회심방 등을 했다)로 시무했던 위계후(魏啓厚)를 중심으로 1914년 기독교를 통한 배일(排日)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민족의식 교육으로 펼친 항일운동은 영광보통학교 생도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 314일과 15일에 영광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순수한 신앙의 열정들을 키워왔다.

위계후는 18841115일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광주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영광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영광교회 조사(助事)도 역임했다. 그러던 중 19193월 서울 탑골공원에서 발발한 3.1운동에 참가한 그는 조철현(曺喆鉉)과 함께 외숙인 송진우를 찾아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영광에 내려오지 못했고, 조철현이 대신 영광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영광군에서의 만세시위 배후로 지목된 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교사직에서 강제 해임되었다. 이후 1921년 무령리 교회를 영광읍으로 옮기고 신축했으며, 유치원을 설립했다. 또한 1922319253월 후세교육을 위해 영광학원(靈光學院)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인 영광중학교(靈光中學校)로 발전시켰으나 경영난으로 폐교되었다. 1934년 영광청년회(靈光靑年會) 회장으로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면서 특히 인근 4개군인 영광·고창·장성·정읍의 체육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 고양과 청년들의 단결심을 고취하였다.
19379월 영광지역의 민족지도자를 검거하기 위해 일경이 조작한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되어 미결상태로 14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92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면소처분을 받아 출감하였다. 1944622일 영광에서 사망했다. 영광군은 보통학교에서 군민장을 치르려 했지만 일본 경찰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교촌리 유치원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위계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지역 독립유공자인 위계후 애국지사는 영광 3·1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영광학원교장으로서 영광중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해 이 운동이 대일본교육항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군민계몽운동과 외화배척 문맹퇴치, 자립경제 등 3대 운동을 주도한 공을 인정받았다.

기독교 신앙인이었으며 독립유공자인 위계후는 영광군이 갖게 되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겠다. 이는 기독교가 20세기 격동하는 시기에 민족의 아픔과 함께 지역민들에게 종교적 사랑으로 선교되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영광이라는 지역과 협력적 행위를 촉진시켜 기독교가 사회적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신뢰였고 규범이었고 네트워크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고 기독교의 속성상 영광 땅을 변화시킬 사랑의 원자탄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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