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 중 하나가 착각이다. 성격이나 인성에 관계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만큼 우리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착각은 뇌에서 만들어내는 현상이지만 곧잘 행동으로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질 낮은 착각은 저질의 인성을 만들고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충분히 아주 많이 넘치게 느끼고 있다. 정치판이 마법의 동아줄을 타고 오르는 경선장으로 변질하면서 줄을 타는 능력은 정치인의 필살기가 되었다. 이쯤이면 능력의 착각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인이 아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난다. 특히 문화 예술 분야에선 정도가 심각하다. 정치인의 능력치 착각은 모르게 행하지만, 예술인의 과대망상적 착각에는 상대가 있으니 직접의 공격과 다툼에 따른 상처와 후유증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하는 착각은 부족한 실력으로 잘 갖추어진 상대를 평가하고 폄훼하는 천박함을 낳는다. 자신의 수준을 알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노력을 우리는 공부라 칭한다. 공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공부란 지식을 쌓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공부가 깊지 못하면 자신이 많이 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기 수준에서 평가를 내린다. 이 평가에 작용하는 지식은 딱 자신의 수준이기 때문에 상대 작가의 높은 수준은 그대로 무시가 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부란 자신의 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뇌의 특성이 더해지면 판단의 폭은 더욱 좁아지고 모르는 게 없는 자아도취형 인간이 된다. 이를 나무라면 인정은 고사하고 제법 합리적인 핑계를 만든다. 하지만 언어는 본인의 인격이고 공부의 수준이다. 그 수준을 넘어서는 말과 글을 구사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딱 그만큼이다. 요즘 대통령의 연설과 부인의 행동을 보면 정확히 답이 보일 것이다. 굳게 닫힌 얕은 지식의 틀은 타인의 지혜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으며 아만(我慢)에 빠져 있다. 여기서 내세우는 정의와 평등은 오랜 시간 젖어온 뇌의 착각이다. 이완용은 가난하고 못 배운 조선인을 위해 합병을 했고, 이병도는 무지한 조선인의 국가관을 위해 식민사관을 정립했다는 합리와 정당성을 내세웠다. 특수한 지위를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고 서민의 돈을 ‘삥’ 뜯어도 능력이지 부패는 아니라는 특별한 신념으로 사는 부류의 한결같은 정의의 착각이다. 다시 말해 “횡령하는 착한 사람들”이다. 유명한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디살보’의 말이다. 여기서 횡령의 합리성을 찾아 ‘도덕적 자기 조절 효과’라는 개념을 심리학자들이 만들어냈다. 실제로 우리는 나쁜 일을 상쇄하기 위해 도덕적인 일을 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만큼 좋은 일도 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멍청하며 행동을 과감하게 이끌지 못한다. 파고들면 세상에 똑똑한 뇌는 없다. 착각하고 망설이며 온갖 핑계만 만들어낸다. 그래서 뇌에 ‘훈련’은 없다. 지성과 판단은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며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뇌를 잊고 마음을 쓰자. 아만을 버리고 자신을 철저하게 들여다보는 게 참다운 공부 아니겠는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면 그래도 약간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이런 마음으로 감히 남의 작품을 평하진 못할 것이다. 평가란 스승이 제자를 위해 내리는 겸허한 가르침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룬 배움에 상한선을 긋는 폐쇄적 성격의 예술가와, 상쇄의 합리성으로 정당함을 부여하는 “횡령하는 착한 정치인들”의 착각은 너무 불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