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자녀(7)-자녀 잃은 슬픔(정약용)
어버이가 돌아가시면 천붕(天崩-하늘이 무너짐)이라 하고, 자식이 먼저 가면 참척(慘慽-참혹한 아픔), 즉 땅이 꺼지는 아픔이라 한다. 부모는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호곡성(號哭聲, 소리내어 슬피 우는 소리)은 창자를 끊는 듯 참담하다. 그래서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도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다 키워 놓고 잃는다는 것은 평생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이다.
다산 정약용의 큰딸은 태어난 지 4일 만에 죽었고, 둘째 딸과 3남, 4남, 5남, 6남은 모두 천연두(‘마마’, ‘손님’으로도 불리는 악성전염병)로 서너 살 안에 사망했다. 특히 다산은 갓 세 돌 지난 아들 농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귀양지에서 듣고, 구구절절 애끓는 아비의 마음을 묘지명(墓誌銘, 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무덤 속에 묻는 것)으로 남겼다.
“네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가 겨우 세 살인데, 그중에서 나와 헤어져 산 것이 2년이나 된다. 사람이 60년을 산다고 할 때, 40년 동안이나 부모와 헤어져 산 것이니, 이야말로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네가 태어났을 때, 나의 근심이 깊어 너의 이름을 농(農)이라고 지었다. 걱정하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에 화(禍)가 닥쳤기에, 너에게는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려 한 것뿐이다. 이것이 죽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으면 흔쾌히 황령(黃嶺)을 넘어 열수(洌水, 한강)를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내가 네 곁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네가 살 수는 없었겠지만, 네 어미의 편지에, ‘애가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의 홍역이 곧 낫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천연두가 곧 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것은 네가 사정을 헤아리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가 돌아오는 것으로 마음의 의지를 삼으려 한 것인데 너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 신유년(1801년, 순조 1년) 겨울에 과천(果川)의 점사(店舍, 작은 가게)에서 너의 어미가 너를 안고 나를 전송할 때, 나를 가리키며 ‘너의 아버지이시다.’라고 하였다. 네가 따라서 나를 가리키며 ‘나의 아버지다.’라고 했으나, 너는 아버지가 아버지인 줄을 실제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웃사람이 집으로 떠나갈 때, 소라껍질 2매(枚)를 보내며 너에게 주라고 하였다. 네 어미의 편지에, ‘애가 강진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소라 껍질을 찾다가 받지 못하면 풀이 꺾이곤 하였는데, 그 애가 죽어갈 무렵에 소라 껍질이 도착했습니다.’ 하였다. 참 슬픈 일이다. 너의 외모는 빼어난데, 코 왼쪽에 조그마한 검은 사마귀가 있으며, 웃을 때에는 양쪽 송곳니가 드러난다. 아아, 나는 오로지 네 모습만이 생각나서, 거짓 없이 너에게 고하노라.”
이 글에 나오는 정농(丁農)은 정약용의 넷째 아들인데, 세 살로 요절하였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중일 때,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무덤에 묻어주는 형식의 편지를 썼던 바,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신의 순탄치 않은 인생사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묘비명이다. 특히 자식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자신의 죄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부모로서의 애절한 마음이 묻어난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