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진 꿈in방 사회복지교육문화연구소 이사장
부자를 평가할 때 미국인들은 ‘열심히 일한 사람’으로, 유럽인들은 ‘운이 좋은 사람’으로 각각 평가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부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유럽과 가까운 편이다. 혹자는 이를 우리의 뿌리 깊은 평등의식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러한 의식의 밑바닥에는 과거 우리 사회에서 부의 형성이 부정부패, 편법, 특권 등에 크게 의존했다는 경험적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풀이일 것이다. 우리의 평등 의식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식이다. 이러한 성취의식은 고도성장기 때 뜨거운 교육열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는 정신적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룬 성취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지배적일 때, 또 현재의 한국처럼 양극화 심화 등으로 기회가 차단됐을 때 ‘나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성취의식은 ‘나만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상실감으로 변질된다.
이런 현상은 단지 우리만의 변화는 아닌 것 같다. 미국에서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이였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팍스 아메리카'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지만 미국인의 삶은 양극화가 구조화되고, 노력에 대한 미래의 확신보다 불안감만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회 전반에 퍼진 이러한 상실감은 다른 계층에 대한 질시와 반목으로 이어져 사회 갈등을 유발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경제성장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얼마나 풍부하냐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21세기 국가경쟁력의 주요 요소인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만 박탈당했다’는 상실감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원래의 강한 성취동기로 되돌려 놓는 것, 계층·지역간 격차를 줄이고 궁극적으로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교육인데 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계급 세습의 수단으로 되어가고 있는 교육을 질적으로 바꿈으로써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한계 지워지지 않고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기대감을 되살려야 한다. 적어도 교육을 통한 기회의 평등과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보장될 때,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신뢰와 사회적 연대감이 형성될 수 있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란 개념은 개인보다는 사회적 관계, 즉 인간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회적(social)이란 단어와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자본(capital)이라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자본은 첫째, 어떤 한 개인이 소유한 특성이라기보다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 둘째, 집단에 의해 공유되며 공공의 성격을 갖는 것 셋째, 관습이나 문화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는 것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이는 인적자본(human capital)과 물적자본(physical capital) 등과 같은 전통적 2대 자본과는 구별되는 제3의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자본이 공공재로 단순히 도덕적 가치로만 머무르지 않고 특정 조건하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자원, 즉 '경제적 공공재'라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적 자본은 한 사회의 잠재적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네트워크·규범·신뢰와 같은 특성을 지니면서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 간에 조정과 협력을 용이하게 해주며, 그 집단의 경제적 상호이익 달성에 기여한다.
사회적 자본의 대표적 유형으로 간주되고 있는 '신뢰(trust)'는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를 기반으로 관련 행위자들은 협력을 할 수 있고, 감시와 통제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신뢰는 사회적 자본인 동시에 다른 유형의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는 일회적이고 기회주의적이 되기 쉽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사회적 자본이 형성될 가능성이 적어진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의 후쿠야마 교수는 신뢰가 국민경제 성과 달성에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구성원 간에 신뢰가 낮은 '저 신뢰 사회'로 한국과 함께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꼽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국가들은 가족 내의 결속력은 강한 반면 타인에 대한 신뢰는 낮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 가족경영과 세습경영 등을 들고 있다.
신뢰는 사람들의 머리가 아닌 가슴과 마음을 열게 해 주며, 사람들을 활기차게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참여정부의 핵심과제인 지역혁신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도 신뢰구축은 필수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혁신의 과정이 단지 기술적·경제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회적 자본의 상호작용 과정을 시스템화하는 동시에 신뢰의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같은 연고주의에 기초한 신뢰가 아니라 지식정보화사회에서 파워의 주요 원천인 전문성에 기초한 신뢰구축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건설적인 사회적 네트워크 형성에 도움을 주어 갈등을 해소하고 거래비용을 줄여주며 학습능력을 제고시켜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