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고봉주 영광군가족센터장·영광신문 편집위원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 두 나무의 가지가 자라면서 맞붙어 하나가 된 현상을 연리지(連理枝)라 한다.

주로 같은 종의 나무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서로 다른 나무 종 사이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놓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애틋한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송시대 이전 춘추전국시대의 송나라)의 강왕은 폭군이자 송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빼어난 용모와 우람한 체구를 자랑했다는데 그 체구 값(?)을 했던지 형인 척성군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으나 국가 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어수선한 전국(戰國) 시절이었기에 누구 하나 나서 시시비비를 하는 나라는 없었다.

재위 초만 해도 그는 한, , 위 등 전국칠웅(戰國七雄)과 겨룰 만큼 국력을 키운 명군이었다.

하지만, 재위 중반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폭군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더니 말기인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술과 여자에 빠져 음탕한 짓을 하는 황음(荒淫)을 일삼다 결국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고 말았다.

신하들에게 무도하게 굴었으며 언로를 차단하고 충언이나 충간을 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형을 하는 등 기분 내키는 대로 나라를 끌고 갔다.

상사수(相思樹)와 연리지(連理枝)

당시 송나라에는 부부금슬이 유난히 좋았던 한빙(韓憑)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더구나 한빙의 부인은 천하 절색으로 모두가 부러워 할 정도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강왕은 한빙의 아내를 강제로 궁으로 불러들여 후궁으로 삼았으며 뒷말이 나올까 두려워 죄 없는 한빙은 변방으로 내쫓아 성 쌓는 일을 하게 했다.

절색미인 아내를 두었다는 죄아닌 죄로 낮에는 적과 싸우고 밤에는 성을 쌓는 고단한 노역을 하면서도 한빙은 늘 아내를 그리워했다.

남편을 사모하던 부인 하씨는 한방에게 짤막한 시 한 수를 편지로 써 몰래 보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其雨淫汗)

강은 크고 물은 깊으니(河大水深)

해가 비치면 (그대를) 보고 싶소(日出當心)

그러나 이 편지는 중간에 발각되고 말았는데 소하(蘇賀)라는 자가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강보다 깊은데 방해자가 있어 어찌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라고 강왕에게 일러바쳤다.

화가 난 강왕은 하씨에게 심하게 굴었으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한빙은 변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빙의 자결소식을 듣고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내던 아내 하씨도 성벽 위에서 떨어져 자결을 했는데 그녀가 강왕에게 남긴 유서에는 부디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강왕은 유서를 내동댕이쳤으나 많은 사람이 이미 유언의 내용을 알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하씨의 청을 그대로 들어주자니 내키지 않았던 그는 "좋아, 너희들이 죽어서도 사랑을 하겠다면 그리 해주마. 어디 너희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보리라."라며 두 사람을 합장하지 않고 떼어내 서로 마주 보도록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밤 사이에 두 그루의 노나무(구릿대나무)가 양쪽 무덤 끝에서 자라더니 열홀이 못가 위로 가지가 얽히고 아래로는 뿌리가 맞닿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원앙새가 앉아 서로의 목을 비비며 구슬피 울어 댔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한빙 부부의 넋이 새가 되어 울부짖는 것이라고 탄식했으며 이때부터 송나라 사람들은 그 나무를 일러 상사수(相思樹)와 연리지(連理枝)라 하였다 한다.

중국의 대 서사시인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라는 시()에서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시로 읊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리...‘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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