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잃은 슬픔-데카르트와 헤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카르트(1596년~1650년, 해석기하학의 창시자. 근세철학의 아버지)는 프랑스 투렌의 작은 도시 라에에서 부유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 라에는 1996년 데카르트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도시 이름을 ‘데카르트’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32세 때인 1628년, 이 고향을 떠나 네덜란드로 건너 간다. 그리고 20여 년 이상을 그곳에서 살게 된다. 종교적, 사상적 자유가 폭넓게 보장되는 이유 때문으로 보이는데, ‘자유의 땅’ 네덜란드에서 그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던 중, 암스테르담에서 헬레네 얀스(에레느)라는 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프란시느라는 딸까지 낳았다. 3년 후에는 알크마르(네덜란드 서북부에 있는 도시. 지면이 바다 표면보다 낮으며, 치즈 및 가축 시장으로 유명함) 가까이의 은둔처에 모녀를 데려다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의 딸은 다섯 살 때 성홍열(급성 감염병. 발열과 인후통, 두통, 구토 등의 증상이 나타남)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에 그는 크게 상심하여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그는 친구에게 “딸의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라고 말했다. 이 슬픔을 견디지 못한 때문인지, 그는 숨진 딸을 ‘살려내기’ 위해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실제 사람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그 인형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덴마크로 떠나는 배 위. 선원들은 그의 배낭에서 인형을 발견하고는 불길하게 여겨 바다에 던져버렸다.
평소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동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혼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으며, 다른 동물들은 그저 기계일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함으로써 철학사에 있어서 ‘합리주의의 교조’로 떠받들어지는 철학자가, 시계 태엽과 금속 조각으로 죽은 딸의 대용품을 만들다니.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철학자의 철학과 그 자신의 삶이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독일의 위대한 관념론 철학자 헤겔(1770년~1831년)은 35세 되던 해, 예나 대학의 원외 교수 철학자로 채용된다. 2년 후에는 헤겔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저서 『정신현상학』이 출간된다. 이 무렵 살고 있던 셋방의 주인이 사망한 후, 헤겔은 그(셋방 주인)의 아내 샬로테와 정을 맺어 그녀로부터 아들(사생아) 루트비히를 얻는다. 그리고는 41세 때, 거의 20년 연하인 명문 집안의 처녀 마리 폰 투허와 결혼을 한다. 이듬해 큰딸이 태어나지만, 수 주 만에 죽고 말았다. 하지만 한 살 차이로 태어난 장남과 차남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장남은 역사학자가 되었고, 차남은 기독교의 종교국장을 지냈다.
한편, 사생아 루트비히는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아버지인 헤겔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이복(異服) 동생들과도 자주 싸웠다. 그러다가 얼마 후 집을 나가버렸다. 그는 나중에(1826년) 네덜란드의 외인부대(外人部隊, 외국인으로 편성되어 있는 부대)에 입대하여 결국 1831년 8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과연 헤겔이 그의 죽음에 대해 얼마만큼 슬퍼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분명 말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마치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헤겔은 아들이 사망한 지 3개월 후 급성 콜레라로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