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걸 전 연합뉴스 기자

간다라가 처음 알려진 것은 기원전 1500~2000년 경에 쓰인 인도 베다 경전인 리그베다라고 한다. 또 중국 현장 스님이 7세기에 간다라를 방문하여 남긴 기록에 동서가 1,000, 남북이 800리라고 나와 있다. 간다라지역의 중심부는 현재 파키스탄 카이버박툰카(Khyber Pakthunkawa) 주의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스와트 마르단 디르 바 주,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인접해 있는 탁실라, 아프카니스탄 잘랄라바드 주변 지역인 베그람 일대이다.

간다라의 어원적 의미는 향기로운 땅이다. 간다라 수도였던 페샤와르엔 카불강과 스와트 강, 인더스강이 흐르고 힌두쿠시 산맥의 지류인 산들에 둘러싸고 있어 간다라가 지형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송운 스님은 페샤와르 주변으로 강물이 둘러싸여 흐르고 주변에 작은 숲들이 많은 비옥한 땅이라고 순례기에서 밝혔고, 현장 스님도 다양한 꽃과 과일, 곡식들이 많이 나는 따뜻한 기후를 지닌 지역이라고 기록했다. 고대사가 찬란했던 곳이라는 기록들이다. 간다라는 인도 내륙, 페르시아, 로마, 그리고 중앙아시아, 중국을 잇는 교통의 관문이었다.

 

대왕도 장군도 스님도 간다라 길 넘나들어

불교가 왕성했던 시절에는 간다라의 수도이면서 중심부인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카이버패스 고개를 넘어 아프카니스탄과 이란을 거쳐 그리스, 로마로 통했고, 동남쪽으로는 인더스강을 지나 인도 내륙까지 이른다. 이 길을 통해 알렉산더 대왕이 탁실라에 진입했고 여기서 충분한 휴식과 사기를 충전한 후 인도 내륙을 정복하고자 했다. 북서쪽으로는 힌두쿠시 산맥, 아래로는 스와트와 치트랄 지역인 이곳에서 힌두쿠시 산을 넘으면 중앙아시아 지역의 타클라마칸 사막 지대와 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지나 중국에 이른다. 북동쪽으로는 카라코람 히말라야 산맥 아래 위치한 길기트, 훈자지역이 있다. 이 길은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8세기 중엽인 747~753년에 들어온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스카르두와 카슈미르에 이르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티베트다. 또 이 길은 726년께 신라 혜초 스님이 카슈미르에서 길기트와 스카르두, 라다크 티베트를 먼저 간 이후 이곳을 통해 간다라로 들어왔다고 한다.

간다라가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왕(기원전 522~486)의 비문이다. 간다라는 인도 대륙을 처음으로 통합한 찬드라 굽타의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2)에 의해 지배받으면서 찬드라 굽타의 손자이자 3대 왕인 아소카 대왕(기원전 272~237)에 의해 간다라에 불교가 전파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대왕이 죽은 이후 멸망하면서 간다라는 다시 그리스계인 박트리아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 왕으로는 처음으로 불교에 귀의해 유명한 메난드로스 왕(기원전 163~150)은 현 시알코트에 수도를 정하면서 펀자브 지역까지 다스렸다. 여기서 젊은 불교 철학자인 나가세나(Nagasena)와 종교적인 토론을 벌여 불교에 귀의하게 해서 남긴 불전이 바로 밀란다왕문경이다.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 게 사카족이라고 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이는 칠라스의 바위에 새겨진 명문과 부처상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잘랄라바드 근처에서 발견된 비마란 사리함에 새겨진 헬레니즘 풍의 부처님상에서 찾고 있다. 박교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간다라 불상 조각과 불경은 기원후 2~3세기인 쿠샨 왕조 때 전성기를 이룬다.

쿠샨 왕조에서도 카니쉬카 왕 때 불교와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맞는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지금까지 발굴된 거의 모든 간다라 불상 조각들이 쿠샨 왕조 시대 카니시카 왕 때 처음으로 부처님을 동전에 새긴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불교예술품은 당시 간다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토착신앙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힌두교, 그리스, 로마신화 등이 불교와 만나 어떻게 간다라에서 꽃을 피워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됐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불교경전에도 간다라는 스님들의 고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고승전은 간다라지역을 최고의 불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특히 스님들의 성지 순례 최종 목적은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간다라 유적을 보고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간다라는 중국에 불교를 전파한 스님들의 본고장이라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고 불경을 번역한 대부분의 스님들이 거의 간다라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법현 스님에 따르면 간다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많은 전생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몸 보시로 희생을 한 전생의 장소가 네 군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몸 보시한 그 자리에 아소카 왕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쿠샨 왕조의 카니쉬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에 불교 경전과 불상을 처음 편찬하고 조성했던 곳이 지금의 실크로드로 불리고 있는 간다라 지역이다. 이곳이 고대 로마, 그리스로 불리는 서양과 인도와 중국이라는 동양을 연결하는 비단길 중심부였다. 그 비단길에서 동서양 문화 문명의 융합으로 꽃피운 것이 불상과 불탑이다. 불상과 불탑은 동서양의 사상을 불교식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그리스 조각가들이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신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전생도를 불상과 불탑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카니쉬카 왕은 조로아스터교의 예배 의식을 위주로 힌두교, 그리스 신 등 당시 다양하게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예배 의식을 수용하면서 불교를 국가 종교로 삼았다. 카니쉬카 왕이 다양한 민족과 종교와 문화를 불교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들 신의 초상을 대신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전생과 일대기를 조각하여 불탑과 사원을 장엄했다. 이를 계기로 간다라 지역에서 불경과 불상은 포교의 성스러운 상징인 성물(聖物)로 포교의 최일선으로 나간다.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고 간다라 문화를 외국에 전파시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그 예로 동서 문화를 융합시킨 독특한 형태의 불교 예술인 간다라 문화가 꽃핀 곳이다. 간다라 예술의 특색은 불상 형태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의 불교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간다라 지역과 간다라 불교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시원과 같은 곳이다. 절에 가면 우리가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불상과 불경이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전래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유래한 그 불상들이 시대에 따라, 사부대중의 발원에 따라 유구한 불교사에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면서 한국 불교사에 한 대들보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사에서 불상의 진원지인 간다라 지역의 역사와 불교 유래를 되돌아보고 어떤 경로를 통해 한국불교에 전파됐는가. 한국불교 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불상의 기원에 대한 시원을 찾아보는 것도 불교가 말하는 마음을 어떻게 불상으로 표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국의 전통 불상은 다양한 형태로 각 전각을 외호 하거나 수호하는 호법 신장 겸 승속의 간절한 발원을 담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간다라 불교 이해 없이는 한국불교를 알 수 없다. 간다라는 불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간다라 지방에서 대승불교와 불상이 처음으로 일었고, 동굴에 유화로 부처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곳으로 지난 2012년 순례길에 나섰다. 당시 함께한 불교학자들에 따르면 불상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부처님 상을 조성할 때 상징으로만 나타냈고, 사람을 닮은 상이나 그림으로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조각상은 유행이 되어 거의 모든 불교국가에서 부처님을 조성하는데 기초가 됐다. 이를 가능케 한 건 융합된 문화 문명의 영향이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이 인도 침략의 동방원정을 통해 남긴 것이 있다면 그리스 문화(헬레니즘)를 전파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동서 문화의 교류와 융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예술 양식인 간다라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간다라 예술은 불상이라는 조각상을 통해 신의 이미지를 사람으로 표현했다

간다라 불교문화를 오랫동안 연구한 민희식 박사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영향이 있기 전 약 500년간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석가모니 부처님 적멸 500년이 지난 이후,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불상이 출현했다. 그 불상이 간다라 예술을 상징한다. 인도에서는 인간이 계속 생로병사를 되풀이한다는 윤회 사상이 강했고, 우주 생성의 일부로서 중생의 삶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인도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일이 우선이지 불상을 조성하여 경배하는 것은 중요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스투파(사리탑)를 비롯해 부처님을 상징하는 유물은 남겼지만 부처님의 열반 후 500년간 불상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아소카왕 때 대제국을 건설하고 불교로 개종한 이후 불교가 간다라지역에서 개화했다. 이어 쿠샨왕조 카니쉬카왕(78~144)때 융성하면서 불상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부처님 전기나 경전도 결집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불교 조각이 조성됐다는 설이다.

 

불상 통해 희망 갈구한 이교도들

쿠샨족은 불교 이전에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어왔다. 이 종교는 인간이 죽은 후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문제를 심판할 때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어 광명세계로 갈 수 있는 희망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사후세계에 대하여 매우 불안해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모시는 빛의 신은 불교와 만나 점차 영원한 광명의 아미타불이 되었고, 모든 사람을 구하는 페르시아 사막의 물의 여신 아나히타는 자비에 넘치는 관세음보살이 되었다. 한편 태양신 마트라는 세지보살이 되어 점차 삼위 일체적 사고로 불교의 아미타 삼존불로 등장한다. 또 중국에서는 로마에서 포도주를 수입하여 마셨는데 이 포도주를 담았던 빈 원통형 질기에 약초를 담가 인도와 페르시아에 역수출하여 팔았다. 이것을 중앙 아시아인들은 동방에 병을 고치는 부처가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동방의 약사여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성불을 정진의 결과라고 생각한 인도 사람과는 달리 간다라 지역에서는 과거에 많은 좋은 일을 한 그 결과 여래가 된 것으로 생각하여 붓다의 수많은 전생 이야기가 생겨났고 이를 바탕으로 부처님 전기를 조각으로 조성하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이처럼 쿠샨족은 페르시아 종교에 인도의 윤회 사상을 도입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불교로 발전시켰다. 쿠샨족에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보다는 이타행을 바탕으로 한 불교 교단의 유지 발전에 있었고 여기에서 대승불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탑이 있는 탁실라는 아소카 왕이 부처님 입멸 후 여덟 개 왕국으로 사리를 분배하여 세운 불탑을 열어 재분배하여 84,000개의 불탑을 세웠던 곳이기도 하다. 탑들의 이름이 다마라지카(Dharmarjika)탑이다.

 

부처님 고행상 원형이 보존된 라호르박물관

라호르박물관은 지난 1864년 펀자브주 박람회를 마치고, 1866년 그 자리에 최초로 박물관을 연 곳이다. 라호르박물관은 파키스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유물을 전시된 장식물, 그리고 그리스 박트리아 시대 유물, 티베트와 네팔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특히 불교전시실에는 간다라 지방에서 발굴된 불상, 불교 조각 중 탁실라에서 옮겨온 거의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2높이의 스투파가 전시돼 있었다.

 

라호르박물관에 보존중인 원형 고행상

간다라미술은 동서양 화합의 결정체로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종, 문화, 종교 간의 하모니이다.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 그리스, 로마의 예술기법이 동양의 불교와 만나 불상을 탄생시켰고, 이 영향은 불상의 입체적인 옷 주름, 손 모양, 물결 모양 머리 등을 통해 잘 표현되어 나타난다. 실크로드는 근대 이전의 육상 또는 해상을 통한 근대 이전의 동서 교역로를 일컫는 말이다. 언어의 의미로 그대로 교역품인 비단을 거래하기 위한 상행로의 의미도 있지만 동서양의 문화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동서로 3대 간선과 남북으로 5대 지선으로 나눌 수 있다. 간다라는 실크로드의 5대 지선중 하나로 동서남북 교통로의 중심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문명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이 이루어진 길이기도 한다. 불교는 이 길을 따라 북상한 다음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한다.

 

정복과 함께 헬레리즘 문화를 전파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지의 문화와 관습, 제도를 포용하는 정책으로 공존공영의 이상을 실현하였고, 그 결과로 그리스의 문화와 각 지역의 문화가 융합되어 탄생한 헬레니즘, 그리고 동서 문화의 교류와 융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예술 양식, 간다라 예술을 탄생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즉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시조인 성인들이다. 그 성인들의 가르침을 받은 이가 알렉산더 대왕이다. 알렉산터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형이상학, 시학,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지의 문화포용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사상적 바탕에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추구했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념이 크게 작용했다.

비장의 보물은 아직 내게 있소이다. 폐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이상 이라는 것이오. 그 이상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으며, 또 내일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오. 무엇이 알렉산더 대왕을 그토록 용맹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이상 때문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파키스탄을 공략하여 넓은 영토를 확보한 뒤에도 지치지 않는 정복욕을 드러낸다. 이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그의 야심찬 계획 때문이었다. 그의 계획은 부하들의 반대로 인해 좌절되지만 그의 이상은 전 세계에 헬레니즘 문화라는 커다란 산물을 남긴다.

우리 역사인 삼국시대의 불상을 살펴보면 간다라 양식과 비슷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반도만의 독자적인 양식과 해석을 가진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퍼져나간 그리스 문화로 인해 간다라 불상이 제작되고, 이것이 다시 실크로드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변천사와 연관성이 놀랍게만 느겨진다.

인간의 모습을 한 첫 불상의 출현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미술과 전파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간다라지역에서 발굴된 당시 불상들을 보면 구불거리는 머리, 깊게 패인 눈, 몸의 형태를 딴 옷의 주름 등 많은 부분이 그리스 신상과 닮아있다.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민희식 공저 마라난타에 따르면 불갑사가 백제에 첫 사찰로 창건된 이후 백제지역 곳곳에 불법이 전파된다. 불교를 체제 사상으로 수용한 카니시카 왕처럼 백제 15대 왕 침류왕 원년인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왔다고 나와 있다. 마라난타 스님이 지금의 중국 절강성에서 해류를 따라 백제에 온 것이다. 침류왕은 마라난타 스님을 궁으로 모시고 왕사로 삼아 예우했다는 기록이다. 이후 17대 왕인 아신왕이 385년에 교령을 내려서 불법을 신봉하여 복을 구하라고 불교를 공인 국교로 천명했다. 이때 마라난타 스님은 절을 세우고 10명을 제자로 삼아 백제에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이다. 침류왕 왕사로 초빙된 마라난타 스님은 그냥 오지 않았다. 불경을 포함한 불상 등 성물을 함께 가지고 왔다. 간다라 문화 문명의 상징물인 불상과 불탑 등 수많은 불교 관련 성물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37년 전인 384년 백제 침류왕은 마라난타 스님의 법력을 전해 듣고 간곡한 삼고초려 끝에 그를 왕사로 모시게 된다. 마라난타 스님은 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 스와트, 탁실라지역의 최고 계급층에 속하던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브라만 계층의 아들은 후계자수업을 위해 천문학, 의학, 고고학, 수학, 역사학 등을 섭렵해야 했다. 수학을 마치고도 마라난타 스님은 브라만 계층의 후계자 대신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의 길을 택했다. 이후 불법 포교의 대장정에 나섰다. 마라난타 스님은 백제 침류왕의 간곡한 초청으로 백제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파하러 온 것이다. 단지 불법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문화가 융합돼 화려하게 꽃 핀 간다라 문화 문명도 함께 백제에 전한 것이다.

 

불두가 신비스러운 성물(聖物)로 호위무사 역할

지금이야 정보통신의 발달로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세계 곳곳의 날씨 정보와 배 비행기 등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별을 보고 날씨를 가늠해야 할 때인지라 마라난타 스님 일행이 백제로 가는 바닷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마라난타 스님이 출발하기에 앞서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자 스승은 불도(부처님 머리 상)를 건네면서 혹시 항해 중 풍랑이 일어 배가 위기에 처할 시에 이 불두를 바다에 던지라 했다. 바람에 의지해야 하는 돛단배의 항해 길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던 시절이었다. 마라난타 스님 일행은 항해 길에 폭풍우를 만나자 스승의 당부대로 불두를 바다에 던져 순탄한 항해 끝에 굴비로 유명한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구에 안착했다. 놀랍게도 마라난타 스님 일행을 태운 배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미 바다에 던졌던 불두가 먼저 포구에 도착해 있었다. 마치 불두가 배의 기착지를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불두는 지금 마라난타 스님이 기착한 법성포 어느 노보살님이 사당을 모시고 조석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법성포의 지명은 불법(佛法)을 전하려는 성인(聖人)이 온 포구라 해서 법성포(法聖浦)라 한다. 이전 지명은 아미타불이 온 곳이라 해서 아무포(阿無浦)라 했다가 법성포로 바뀌었다. 또 마라난타 스님은 본인 일행이 탄 배보다 바다에 던진 불두가 먼저 포구에 와 있던 기연을 침류왕에게 진언해 인근 모악산에 사찰을 창건하고 이름을 불갑사로 명명했다는 이야기다. 불갑사(佛甲寺)는 부처 불(), 첫째 갑(), 부처님을 모신 첫 번째 사찰이라는 의미다. 불갑사가 위치한 모악산 8부 능선에는 해불암(海佛庵)이 있고, 인근에는 부처님 손자라는 뜻을 지닌 손불면(孫佛面) 등 불가와 인연이 있는 지명들이 영광군 인근 곳곳에 있다. 이는 마라난타 스님이 부처님의 후손이라는 뜻이자 바다를 통해왔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때인 723-727년 혜초 스님이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인 간다라지역 다섯 나라를 순례하고 쓴 왕오천축국전.
신라때인 723-727년 혜초 스님이 마라난타 스님의 고향인 간다라지역 다섯 나라를 순례하고 쓴 왕오천축국전.

 

신라 혜초스님 340여년만에 마라난타 스님 고향 답방으로 쓴 왕오천축국전

신라 스님인 혜초 스님이 723년부터 727년까지 천축국 다섯 나라를 순례하면서 그들 나라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바로 지금의 간다라 지역이다. 인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 그리고 보통 중동으로 분류되는 페르시아(이란)까지 여행한 기록이다.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세계 4대 여행기이자 순례기로 꼽히고 있다. 그 혜초스님은 불교의 고향 천축국을 순례했지만, 마라난타 스님은 그 천축국에서 340여 년 전에 백제로 온 것이다. 수백년만의 답방이라고 볼 수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지난 1908,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중국 간쑤성의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고 있던 왕원록에게서 희귀한 고서를 사들였는데 그중에 왕오천축국전이 끼어 있었다고 한다. 본래 3권으로 편찬되었으나 현존 본은 그 약본으로 앞뒤 부분은 유실된 체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왕오천축국전이 중국 둔황에서 발견돼 당나라 출신 스님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1915년 일본의 사학자 타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가 신라 혜초 스님임을 입증한 것으로도 일화를 남겼고 한국이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점도 기연이다.

우리는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기억하지만,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 왕사로 백제불교의 시조라는 점을 역사의 그늘로 잊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유입과정을 보면 유일하게 백제만 왕이 마라난타 스님을 왕사로 모시고 불교를 국교화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아도화상과 묵호자로 불리는 스님들이 숱한 곡절 속에 전파한 점과는 비교된다.

세계 어디서도 이같은 문화 변천사의 흐름을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영광은 보존하고 미래를 향한 신실크로드를 모색하고 있다. 간다라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처 백제 영광으로 온 길을 역으로 대한민국 영광에서 중국 길을 가로질러 간다라로 우리가 축적한 문화문명을 결초보은하는 길이다. 나는 이를 신실크로드라 부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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