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우정-박지원과 박제가(1)

요즘 사람들의 소통 방식으로 SNS가 각광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장점이 있겠으나 한편으로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많으니,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불문곡직하고 불쑥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 여겨진다.

이 대목에서 정조 때의 실학자인 박지원(1735~1805)과 박제가(1750~1805)의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박지원은 북학파에 속한, 서울 양반 출신의 개혁사상가였다.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북학파를 형성한 박제가는 박지원에게서 배웠으며, 저서로는북학의등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는지 그 첫 장면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박제가가 19세 때의 일이다. 그는 당대에 문장(文章, 글을 잘 짓는 사람)으로 이름 높던 박지원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는 워낙에 컸다. 박지원은 명문 반남 박씨의 후예로서 문단의 총아(寵兒)였던 반면, 박제가는 서얼출신이었다. ‘서얼’(庶孼)에서 서()는 양인(良人)의 첩 자손을, ()은 천인(賤人)의 첩 자손을 가리킨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서얼 출신들은 인재 등용이나 재산 상속에 많은 제한을 받았다. 더욱이 나이도 박지원이 13세나 많았다.

드디어 소년 문사(文士) 박제가가 다 쓰러져가는 박지원의 집 사립문을 두드렸다. 과연 집주인의 태도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30대의 박지원은 가슴을 풀어 헤치고 망건(網巾, 상투를 한 사람이 머리털을 가지런히 하기 위하여 이마에서 뒤통수에 눌러쓰던, 그물처럼 생긴 물건)도 쓰지 않은 채, 맨상투를 너덜거리며 뛰어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박제가를 방 안으로 맞아 들였다. 두 사람은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문학과 세상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저녁 때가 되었다. 박지원은 차 끓이는 주전자에 밥을 해서는 물 담는 옹기(甕器, 질그릇과 오지그릇) 그릇에 퍼 담아 들여왔다. 두 사람은 맨바닥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다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손님(박제가)은 이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열흘이고 한 달이고 집으로 돌아갈 줄 몰랐다. 훗날, 박제가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 오랜 친구를 대하듯, 따뜻하게 손을 맞잡았다. 선생은 직접 쌀을 씻어 밥을 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어떠한 업적을 남겼던가? 먼저, 박지원은 천문, 지리 등 서양의 자연과학을 주의 깊게 연구하였으며, 사회 개혁의 창도자이자 저명한 문학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홍국영은 박지원과 그 일파가 세상을 깔본다고 여겨 벽파(僻派,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사망한 사건을 두고 세자를 배척한 당파. 이 벽파와 사도세자를 동정한 시파의 대립은 정조 ·순조 때까지 이어짐)로 몰아붙였다.

이에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 땅에 있는 첩첩산골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년을 보내고 난 박지원은 사신을 따라 청나라로 갔다. 청나라의 문물과 중국인의 생활 및 과학기술을 관찰하고 많은 학자들과 사귀었다. 귀국한 다음 저 유명한 열하일기를 썼는데, 특히 여기에 담긴 호질문허생전은 풍자문학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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