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우정-박지원과 박제가(2)
지난 호에 소개한 연암 박지원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박제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박제가(1750~1805년)는 우부승지(정3품)를 지낸 박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박제가는 이미 서자(庶子)였다. 당시 서얼(庶孼, 양인 첩의 자식은 '서', 천인 첩의 자식은 '얼')은 과거 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고,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다.
다행히 조선 후기에 이들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이들 가운데에서도 문과 급제자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정조 재위 기간에 임용된 30명의 서자 출신 관료 가운데 박제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박제가는 그의 나이 11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그 후로는 당연히 생계가 곤란해졌다. 남의 집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우는 그의 모친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글 짓는 것을 좋아했던 아들을 위해 온갖 뒷바라지를 다했다. 하지만 모친 또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박제가의 나이 24세 때였다. 이후로는 장인인 이관상이 큰 도움을 주었다. 충무공의 5대손이었던 이관상은 박제가를 보자마자 맘에 들어 했고, 사위로 삼은 후로는 그의 뒤를 잘 봐주었다.
박제가는 이덕무와 유득공 등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서자 출신 지식인들과 교류를 나눴다. 이 가운데 이덕무는 서장관 자격으로 중국에 들어가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자세히 기록해 왔으며, 고증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가져왔다. 그가 죽자 정조는 장례비와 유고집 간행 비용을 대주고, 그의 아들을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살아생전 이덕무가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을유년 겨울 11월에 서재가 추워 뜰아래 있는 조그마한 모옥(茅屋, 초가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집이 매우 누추하여 벽에 언 얼음이 뺨을 비추고, 구들 틈으로 새어나오는 연기가 매캐하여 눈을 아프게 했다. 아랫목이 불쑥하여 그릇을 놓으면 물이 반드시 엎질러지고, 해가 비치면 쌓였던 눈이 녹아 썩은 띠에서 누르스름한 장국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한 방울이라도 손님의 도포에 떨어지면 손님이 깜짝 놀라 일어나므로, 내가 사과하면서도 게을러서 집을 수리하지 못했다. 눈이 올 적마다 이웃에 사는 작달막한 늙은이가 새벽이면 대비를 들고 문을 두들기며, ‘딱한 일이여! 연약한 수재가 추위에 얼지 않았는지’ 하면서, 먼저 길을 내주었다.”
다음으로 유득공(1748년~1807년). 그가 5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유춘이 전염병으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유득공은 돈의문(서대문) 앞 경행방(현재 종로2 · 3가, 낙원동 등)에서 서당에 다니고, 모친 홍씨는 고관들의 삯바느질을 했다. 홍씨는 아들을 서당에 보내면서도 ‘아비 없는 아이’라는 말을 듣게 하지 않기 위해 항상 깨끗하고 화려한 옷을 입혔다. 하루는 유득공이 어떤 구절을 발견하고 기뻐서 벌떡 일어나다가 옆에 있는 기름통을 쏟고 말았다. 순식간에 기름이 책과 삯바느질을 하던 비단을 적시고 말았다.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린 아들에게 모친이 자애롭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비단 값을 주면 그만이다.”
홍씨는 이튿날 비단 주인을 찾아가서 두 배로 변상을 하겠다고 말하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고관은 홍씨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