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우정-박지원과 박제가(3)
어떻든 박제가가 박지원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10대 후반 무렵이었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성황을 이룬 백탑 시파(서울 종로 2가의 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살았던 북학파 시인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문인들은 서얼(조선시대 첩의 자식)에 대한 차별 의식이 없었고, 무엇보다 지적 능력을 우선시했다. 개방성과 개성을 존중했던 이들 속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발휘하고 꽃을 피웠던 것이다.
또 하나, 서얼 출신을 차별하지 않은 곳은 청나라였다. 청나라 문인들은 박제가에 대해서도 학자나 시인으로 평가할 뿐, 출신에 대한 편견은 전혀 갖지 않았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조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리하여 박제가는 그 누구보다 청나라를 사랑했다. 마침내 박제가는 1778년, 정사(正使) 채제공(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에서 그의 아들 정조 임금의 정책을 충실히 보필)의 도움으로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로 향한다. 답답한 조선의 현실을 떠나 중국으로 간 박제가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중국어와 만주어를 동시에 할 수 있었던 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다녀 온다. 그리고 그 결실이『북학의』로 맺어졌으니, 이 책은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기술한 책이다. 여기에서 ‘북학(北學)’이란 말은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라 여겼고, 그렇게 된 원인은 우물 물을 긷지 못한 것처럼, 부(富)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중시했던 검소와 절약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박지원은 자신과 박제가가 ‘마치 한사람인 것처럼’ 그 뜻이 일치한다고 말했다. “이 책은 나의『열하일기』와 그 뜻이 어긋남이 없으니, 마치 한 작가가 쓴 것 같다. 나는 몹시 기뻐 사흘 동안이나 읽었으나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열하일기』(熱河日記)란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 문집이다. 1780년(정조 4년)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제(고종)의 칠순 잔치에 참석하는 사신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중국 연경을 지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지인 열하까지 여행한 기록을 담았는데, 중국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중국의 문물제도를 보고 견문한 내용을 각 분야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하북성 동북부 난하(濼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쪽에 있는데, 이 ‘열하’라는 지명은 무열하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륭황제는 이곳에다 거대한 별궁을 짓고 거의 매년 행차하여 오랫동안 머묾으로써, 열하를 북경에 버금 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 책에는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문학 · 예술 ·지리· 역사 ·풍속 ·토목 ·건축 ·선박 ·의학 ·인물 ·천문 ·병사 등 모든 분야가 광범위하고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서, 수많은 <연행록(燕行錄)>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유명한『호질(虎叱)』(호랑이의 질책>과 『허생전(許生傳)』같은 재미있는 소설이 실려 있다. 박지원은 이러한 비유적인 소설들을 통하여 트집이 잡히지 않으면서도 조선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 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