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인간의 조건을 말하는 장르는 많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화 제목이기도 하고, 인간의 조건을 자연 세계에 속하는 인간의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한나 아렌트의 책을 요약 정리한 글이기도 하다. 앙드레 말로가 1933년에 출간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에릭 호퍼가 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아포리즘으로서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외에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명제를 깔고 쓰인 글과 예술 작품은 많다. 그만큼 인간의 조건을 향한 질문은 예전부터 지속되었다. 소설로 쓰인 대부분 글은, 인간의 조건을 전쟁과 투쟁을 통한 극한 조건에서의 인간 내면을 다루고 있다. 우리 성리학처럼 본성을 더듬는 인간의 조건에 치중하는 글은 아니다. 존재의 독특한 특징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리고 생물학적인 조건 등은 지극히 일반적인 서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인간의 조건이란 두 어절의 문장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이유가 우리 정부의 최고위 관리들 때문이라니 스스로 어이가 없지만 당장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인간을 이분법으로 단순하게 정의하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한다. 일부 종교에서 선과 악으로 나누고 때로는 선신과 악신으로 구분 짓기도 한다.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도 어차피 사람에게 내려진 판단이다. 하지만 현재 정부에서 ‘대행’이라는 이상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의 행위에 그냥 일반적인 ‘나쁜 놈’이라는 간단한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대우를 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나쁜 놈이라는 표현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이는 인간을 숙성하게 만들고 욕심을 갈무리하게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내란 부두목의 행위는 반대로 치닫고 있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모르면 이렇게도 된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을 보면 인간이 부끄러움을 최초로 알게 되는 나이가 두 살이라고 한다. 인간의 작은 조건이 출발하는 나이다.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취하고 가장 먼저 느낀 게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을 한자어로 수치심(羞恥心)이라고 표기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태어나서 24개월이면 느끼는 수치심을 80에 가까운 노인이 느끼지 못하는 현상은 이해를 넘어 기이하기까지 하다. 우리 조상은 일찍이 수치의 중요성을 알았다. 인간의 본성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사단칠정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에서 나오는 마음과,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마음은 심(心)이고 감정은 정(情)이다. 심(心)은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각각 나타내며 선한 본심인 덕(德)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측은지심은 사랑이고, 수오지심은 부끄러운 마음이다. 사양지심은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이고, 시비지심은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여기에 권한대행 한덕수와 최상목 부총리를 대비시켜 보자. 일치되는 게 하나도 없다. 권력을 양보하는 미덕도, 선악을 판단해서 내란을 정리하려는 마음도, 타인을 측은하게 여기는 사랑도, 특히 부끄러움을 아는 수치심도 없다. 이게 우리의 어른이라니 말문이 막힌다. 맹자는 사단(四端)을 선(善)이 발현할 가능성을 포함한 출발이라고 공손추 편(公孫丑 篇)에서 정의했다. 특히 부끄러움을 아는 수오지심은 인간의 가장 본심을 차지하고 있어서 덕의 기본이 된다. 덕은 유가뿐만 아니라 도가에서도 귀하게 다룬다. 사단이 덕이고 덕이 선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덕수와 최상목은 절대로 인간의 부류에 들어가지 못한다. 나쁜 ‘사람’의 개념을 벗어난 사단 이탈자이기 때문이다. 사단을 이탈하는 부류를 우리는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의 조건을 상실한 것이다. 이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부끄러움은 순간이고 자리는 영원하다”라는 악마의 속삭임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