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일순 수필가·사진가
하루하루의 변화가 격동적이다. 어제 쓴 글을 오늘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총성 없는 전쟁이다. 삼권을 장악하려는 무리와 이를 최대한 지키려는 국민의 싸움이다. 민주당과의 다툼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정확하게는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와의 대결 양상이다. 그들이 겨눈 총부리는 정확하게 국민 주권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1차 내란이 막히자, 사법권을 이용해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다시 겨냥했다. 이번에는 법이라는 무기다. 국민 개인의 인권을 지키라는 법치의 권리를 주었더니 역으로 국민에게 겨누었다. 솔직히 지긋지긋한 정치 이야기 그만하고 싶다. 지역의 조그만 매체에서조차 현실의 카오스 판을 다루어야 한다는 게 조금 민망하지만, 크게 밀려오는 스트레스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문제는 이상한 사람의 이상한 계엄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사법부로 침투한 내란 바이러스는 대법원이라는 엄중한 기관을 통해 다시 분출되었다. 죽지 않는 좀비처럼 스멀스멀 살아나 국민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권리인 투표권까지 공격했다. 1번 유력 후보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우고 2번 후보를 가볍게 당선시키는 사법 공작이다. 엄격히 따지면 사법부는 아니다. 대법원장을 추종하는 9인의 판사라는 개념이 옳다. 사법부 판사 3,200명을 모두 한 솥에 넣고 조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대법원 관례와 규례 그리고 형사법을 어김은 물론, 일반 국민도 도저히 이해가 힘든 졸속 파기환송 심의는 최악의 판례로 사법 역사에 영구히 남을 것이다. 평생을 최고라는 자부심에 갇혀서 사회 적응의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미완의 인재(人災) 유발성 인재(人才)들은 자신의 명예에 스스로 대못을 쳐버렸다. 이들에게 공감은 없다. 대단한 자기와 별 볼 일 없는 국민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딱히 악과 선의 구분 점 또한 가려내지 못한다. 단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번에 저지른 기이한 행위의 결과다. 지금까지 누구도 상고심을 비난하거나 결과에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본인까지 실형을 받은 조국 전 대표도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감옥으로 향했다. 아무리 분하고 억울해도 정의의 기준점인 사법부, 그것도 상고심 대법관을 표면적으로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커밍아웃한 이번 사태로 대법관이 중요한 상고심을 파기환송 하는데 상고이유서 혹은 항소심 재판 기록도 읽지 않고 판결한다는 괴상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읽었다는 주장은 물리적으로 맞지 않으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파기환송심을 맡게 된 고등법원 항소심은 5단계의 처리를 단 하루에 끝내는 신공을 보이며 대법원의 의지를 받드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 권리의 최후 보루인 투표권을 빼앗으려는 시도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2백만을 넘긴 국민 서명과 국회의 강력한 반격에 기겁한 온실의 잘난 화초들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재판을 모두 대선 뒤로 미룬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그들은 과연 이런 결과가 될 것을 몰랐을까’이다. 몰랐을 것이다. 지금까지 대법원의 판결에 불복이란 없었으며 한결같이 ‘판결을 존중한다’라는 승복뿐이었기 때문이다. 법으로 세상을 통치한다는 저열함이 그들의 의식에 존재하는 한 그 생각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법부, 정확하게는 판사의 계몽이 필요하다.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특권 의식을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국민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법이 국민을 지켜야 한다. 법은 판사다. 판사가 국가라는 거대 권한으로부터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을 법으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법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오히려 공격하고 있으니 괴이한 법리이다. 미국과 프랑스도 민주화의 마지막 걸림돌은 판사였다. 이제 국민을 대변하는 국회의 권한으로 사법부를 정상화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실행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실행은 강력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