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우정-마르크스와 엥겔스(1)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에도 관포지교못지않은 아름다운 우정이 있었다.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 스토리이다. 우리에게 공산주의 사상의 원조로 인식되는 칼 마르크스는 독일 라인 지방 트리어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Bonn) 대학의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법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학생으로서의 마르크스는 그리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었다. 싸우다가 다치는가 하면, 캠퍼스 안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마셔 학생감옥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1836616일부터 6 17일까지 하룻동안 학생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기록이 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죄목은 밤늦게 길거리에서 고성방가이고, 수감 태도는 상당히 얌전했다고 쓰여 있다. 1386년에 세워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안에는 재미있게도 학생 감옥이 있었고, 17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가벼운 죄를 저지른 학생들은 2주일 동안 이곳에 갇히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 3일 동안은 빵과 물밖에 주지 않고 밖으로도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사식(私食)도 허용되고 수업도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학생들은 처벌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젊은 날의 낭만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금지된 무기를 갖고 있다가 고소를 당하는가 하면, 흥청망청한 돈 씀씀이로 빚을 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23세의 나이에 한 시간도 출석한 적이 없는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참고로, 독일의 대학에서 박사과정 이수자는 출석을 크게 강요받지 않는다.)

어뗳든 그 후로 마르크스는 헤겔 학도의 모임인 박사 클럽의 회원이 되어 그곳에서 밤낮 없이 토론에 열중하였다. 교수가 되려고 하였지만, 대부분의 헤겔 좌파들처럼 그 역시 보수주의적인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당시 대부분의 헤겔 좌파 지식인들은 기존 질서 및 현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꺼끄러울 수 밖에 없었음)

이러한 사정으로 교수직 진출을 포기한 마르크스는라인 신문의 편집장을 맡아 진보적인 논설을 싣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자리 역시 정치적 이유에 의한 프로이센 정부의 발행금지 명령과 신흥 자본가들의 미지근한 태도로 인하여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마르크스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서둘러 결혼을 하였고, 그런 다음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가난과 불행으로 가득 찬 한 철학자의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파리에서 친구인 루게 가족과 함께 일종의 공산주의적인 공동체 생활을 꾸려간다. 그러나 그의 융통성 없는 성격 때문에 그 가족과 곧 갈라서고 만다. 이후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프랑스에서마저 추방을 당한 마르크스는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로 가서, 17명의 회원을 모아 제1차 세계 공산당을 창당한다.

마르크스가 평생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엥겔스를 만난 것은 신문사의 주필로 일할 때였는데, 둘은 서로가 쓴 글과 대화를 통해서 사상적 동질성을 발견했다. 하지만 엥겔스가 사회 개혁을 위한 수단으로 무장투쟁을 선택하여 반란에 의해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동참했던 반면, 마르크스는 그런 방법으로는 목적 달성이 어렵다고 보았다. 어정쩡한 반란은 정부군의 강한 세력 앞에 힘을 쓰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란에 동참한다. 그러나 결국 정부군에 패배하고 만다. 마르크스 역시 정부의 탄압 때문에 신문사를 나와, 당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던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이 무렵 엥겔스는 영국으로 돌아간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운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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