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우정-마르크스와 엥겔스(3)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마르크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전략 전술 문제들을 토론하였는데, 이 시기 엥겔스는 군사 분야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1864년에 그는 마르크스와 함께 제1 인터내셔널(런던에서 창립된 최초의 노동자 국제조직) 을 창건하였으며, 파리 코뮌(1871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세워진 혁명적 자치 정부)을 적극 지지하였다.
엥겔스는 1848~1849년의 ‘독일 혁명’에도 적극 참가했었다. 그렇다면, 과연 ‘독일 혁명’이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에 의해 독일은 38개의 주로 나누어지고, 각 주에서는 절대주의적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1848년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에 모여 내각을 세웠다. 그리고 이 내각과 의회를 통해 독일인들에게 자유·평등한 시민권과 민주주의적인 모든 권리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국민의회로부터 황제로 선출된 빌헬름 4세가 그 직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의회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 독일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엥겔스는 맨체스터의 공장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이 투쟁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독일농민 전쟁」, 「독일에 있어서의 혁명과 반혁명」을 집필하고, 투쟁에 있어 농민이 지니는 의의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엥겔스는 런던에 와있던 마르크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널>을 조직하고, 이 안의 쁘띠 부르주아적(현대에서는 작은 기업주, 자영 점포상인, 지식인, 공무원, 예술가 같은 중산층을 일컫는다. ‘자기의 보신만을 추구하는 계층’이라는 뜻으로 사용할 때도 있음), 기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 보통 혼란, 무질서 등을 의미) 견해와 투쟁을 펼쳐 나간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대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나이가 든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다. 잡지 창간은 실패하였고, 무섭게 불어나는 가족들과 경제적인 궁핍이 그의 목을 짓눌렀다. 가구를 차압당하는가 하면, 언젠가 한번은 그의 옷이 전당포에 잡혀 있어서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병마(病魔)는 끊일 새 없이 그의 가족을 찾아들었고, 그의 자녀 가운데 몇몇 아이만이 태어난 첫해를 겨우 넘겼다. 부인 예니는 절망에 빠져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느니, 나와 아이들은 차리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빚으로 압박 받다가 마침내 파산을 선고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평생 동안 그의 충실한 벗이었던 엥겔스가 이 최악의 조치를 막아준다. 만약 부유한 섬유공장주의 아들인 엥겔스가 그를 경제적, 정신적으로 후원하지 않았던들 그의 삶은 보다 일찍 비극적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마르크스는 결혼과 함께 아이를 낳았지만, 엥겔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딸들은 엥겔스를 삼촌으로 여겼고,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까지 그의 딸을 돌보았다. 후원자 엥겔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그 동안 집세를 내지 못해 오히려 집주인이 쫓아내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제대로 끼니를 이을 수도 없으며, 딸과 하인의 약값조차 대지 못한다고 슬퍼했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