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우정-마르크스와 엥겔스(4)

앞 호에서 우리는 엥겔스가 친구인 마르크스를 얼마나 끔찍이 위했는지 살펴보았다. 옷이 전당포에 잡혀 있는 상황, 파산까지 선고하려 맘먹고 있던 마르크스에게 엥겔스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에 마르크스의 딸들은 엥겔스를 삼촌으로 여겼고, 엥겔스 역시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까지 그의 딸을 돌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우정에 대해 제대로 된 보답하기는커녕 어깃장을 놓는다. 엥겔스가 자신의 아내를 잃고 커다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마르크스는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로의 말보다도 구걸의 내용이 훨씬 길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둘 사이가 서먹해졌다가 다시 화해하였다는 건데, 그러나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하녀와 연애소등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번져 나간 것이다. 그 내용이 너무 악의적이어서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는 하녀에게 임신을 시켰으며(1851), 이 일 때문에 아내인 예니의 고통은 일생 가운데 최고조에 달했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이 사실을 아내에게 속이고자 하녀의 상대역을 엥겔스에게 맡겼으며, 죽음에 임박해서야 엥겔스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이러한 내용이 실제보다 과장되고 왜곡되었다 해도, 이 연애 사건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가정의 분위기는 완전히 흐트러지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마르크스의 도에 넘는 배신 행위와 온갖 실망스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엥겔스 자신은 끝끝내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이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했다는 점은 나름대로 평가할만 하다고 하겠다. 1850~1864년까지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대영박물관의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의 유럽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 (영국)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 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또다시 재정적 원조를 보내왔으며, 이러한 일들로 마르크스 가족은 경제적 곤란을 조금 벗어나게 된다.

1865년부터 마르크스는 필생의 대작인자본론을 쓰기 시작하여 3년 후, 1권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체 모습을 밝힘과 동시에 자신의 유물론 사상을 집대성한 이 저서의 2권과 3권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친구인 엥겔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1881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1월에는 큰딸의 죽음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마르크스는 그해 314,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엥겔스는 추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대자는 많았으나, 개인적인 적()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살아있을 것이며, 그의 저서도 그럴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1883)자본론2~6권의 간행에 몰두하면서, 유럽 국가들에 있어 노동 운동의 지도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75세가 되던 18958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엥겔스의 추도사를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나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고 사랑한, 고매한 한 인격을 보게 되는 것이다.(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운용중)- ‘마르크스와 엥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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