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희 (사)여민동락공동체 이사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는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 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무라세 다카오, <돌봄, 동기화, 자유>(2024) 중에서

치매에 걸린 노인의 일상을 묘사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치매에 걸린 노인은 평생을 억눌려왔던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듯 하다. 시설의 문법을 뛰어넘는 돌봄의 언어들이 신선하다. 치매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치매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어르신들은 치매를 업병이라도 하시는데, 전생의 악업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병이라는 뜻이다. 치매를 노화 현상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본에서 요리아이노인요양시설을 운영해 온 무라세 다카오는 책 돌봄, 동기화, 자유에서 노화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늙음=부자유라고 보는 시각은 착각일 뿐이다. 시공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기억이 모호해지며, 행동의 순서를 망각하는 노쇠한 몸. 노쇠한 몸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잘 알지 못하는 '약동'이 있다. 지금까지 ''를 억압해왔던 사회적 통념과 구속에서 해방되고, 자유롭지 않은 몸이 자유를 가져다주는 '노화'는 경이롭다. 늙고 쇠약해져 잃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삶의 소중한 가치에 주목한 것, ‘돌봄은 그 존엄한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돌봄은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응답이자, 미래의 노인이 현재의 노인에게 건네는 애정과 연대의 손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돌봄은 경이로운 노화 과정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경이로운 세계인 것이다.

늙고 병들어 신체기능과 인지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것은 자립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늙고 쇠약하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돌봄의 현장에서 매일 만나는 어르신들을 통해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존엄하게 늙어간다는 것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돌봄의 세계는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고, 이성으로만 제어할 수도 없는 세계이다. 때로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투입 대비 산출효과를 분명하게 계산할 수 있는 '사업'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어르신의 무표정, 무감동한 반응 안에도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다.

돌봄은 상호작용이다. 일방적이지 않고 호혜적이다. 돌봄을 주고 받는 이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설사 극단적인 악조건에 처하는 순간에도 돌봄은 상호적일 수 밖에 없다. 돌봄과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는 선입견에 맞서는 노력은 증상대신 당사자인 사람 그 자체를 보려는 돌봄 실천이다. 어르신과 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실패를 반복하는 듯한 나날일지라도, 그 시간의 축적이 곧 ''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누군가를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이전보다는 더 나은 사람, 좀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노인복지센터에 오시는 어르신이 어떤 병증을 앓고 있든, 어떤 성격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수용하고 관계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가야 한다.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일상은 날마다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 감정들, 이야기들과 뒤엉켜 ''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만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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