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법성문화진흥원 고문
매년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바로 가마미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의 고운 모래, 솔숲 너머로 붉게 물드는 서해 낙조, 그리고 시원한 파도 소리. 그 모든 풍경이 사람들의 기억 속 여름을 채워왔다. 요즘은 인공지능(AI)이 대세라 OpenAI와 Google에 물어보았다. “이 해수욕장이 언제 개설되었지?”라고. 대답은 모두 “1925년에 처음 개장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등”이었다. 결론적으로 AI가 단정한 이 답은 틀렸다. AI는 그릇된 이 정보를 <홍농읍 홈페이지>를 인용(?)하여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국내여행 정보 서비스인 <대한민국 구석구석>(visitkorea.or,kr)에서 습득한 것 같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해수욕장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40년, 일제강점기 때였다. ‘조선일보 기사와 ‘영광군수 연설문집’이 이를 명확히 뒷받침한다.
가마미와 계마리, 그리고 모래찜 바탕
조선시대 홍농면은 가마미를 포함하여 50개 마을로 구획되어 있었다. 이 마을들은 일제강점기에 9개 리로 통폐합된다. 이때 태어난 지명이 계마리다. 작은 한촌(閑村)이었던 가마미는 일제강점기에 마쓰이 오토이치가 어업기지로 개발하여 일본인들의 거점이었던 법성포에서 목넹기, 가마미로 이어지는 차도가 1934년에 개설되었다. 이렇게 교통인프라가 확장되고, 도로가 닦이면서 이곳은 한여름 피서지로 태어났다. 참고로 이 해수욕장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지금의 전남방조제에서 도래지로 가는 도로 중간지점에 있던 ‘모래찜바탕’이 법성포와 인근지역의 피서지이자 해수 찜질 터였다. 이곳은 백사장이 아닌 검은 모래 바탕이었다. 삼복염천에 태양열로 달아오른 뜨거운 모래에다 몸을 묻으면 산후부인병이나, 허리 신경통과 피부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1950년대 말까지 많은 아낙들이 이곳을 가득 메웠다.
법성포해수욕장에서 가마미해수욕장이 되기까지
광복, 이듬해(1946년) 여름에 법성중학교 여학생 4명과 인솔했던 여선생이 급류에 휩쓸려 익사한 아픔도 있었지만, ‘법성포해수욕장에서 해방기념 제1호 수영강습회 개최’ 제하의 ‘자유신문’(1948. 07. 20) 보도에서와 같이 한동안 이곳은 법성포해수욕장으로 소개되며 해마다 수영, 축구 등 여러 강습회, 연수회 장소로 손꼽혔고, 광주 살레시오고교에서 별장까지 두었을 정도로 인기 피서지였다. 그래서 홍농에 속하는 행정구역이었지만 법성면에서 개장에 맞춰 숙소, 식당, 탈의장, 목욕탕을 신설하고, 정기 버스 운행을 추진하여 교통편의를 제공하였다.(「경향신문」 1957. 07. 14)
1960년대에 이르러 ‘가매미’, ‘가마미’, ‘계마리’로 혼용하였던 해수욕장 이름은 1970년대에 이르러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가마미해수욕장’으로 소개하면서 ‘가마미해수욕장’으로 통칭되었다.
원전으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
1970년대까지 매해 백만 피서객으로 붐볐던 이곳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본격화되는 1980년대부터는 상항이 달랐다. 피서객의 발길이 뜸해져 흥성했던 상권이 해마다 위축되었다. 특히 방사능 공포로 피서객과 방문객이 찾아오기를 꺼렸고, 한전과 정부 대 지역사회의 갈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1993년에는 관광지 지정이 취소되고, 연간 55억 톤을 쏟아내는 원전의 온배수로 바다생물의 먹이 사슬이 파괴되었다, 해안의 지형변화로 곱고 하얗던 모래가 검은 갯벌 밭이 되어 피서철이 되면 수많은 모래를 퍼 날라 인위적으로 모래사장을 만들어야 했다. 수질도 해수욕에 부적절한 3등급 이상으로 판정되어 수영하기에 부적합한 해수욕장이 되었다.
2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영광군과 지역사회단체들의 꾸준한 노력과 원전이 일조하여 그동안 드리웠던 먹구름이 조금씩 걷혀가고 있다.
이곳의 진짜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는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가마미해수욕장’은 단순한 피서지가 아니라, 우리 지역의 생활사와 풍광, 아픔과 회복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