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철천지 원수로-손빈과 방연(1)
비록 철학자들은 아니지만, 지난 호의 두 사람(한비자와 이사)보다 더한 경우가 중국에 있었다. 귀곡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병법가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귀곡 선생은 기원전 4세기 전국 시대에 살았던 정치가를 가리킨다. 제자백가 가운데 종횡가(縱橫家, 정치적 책략으로써 국제 외교상에서 활약한 유세객들)에 속한 사상가로서, 그는 소진(蘇秦, 강대국 진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과 장의(張儀, 진나라와 6국이 각각 손을 잡게 함으로써 진나라의 발전을 꾀한, 이른바 연횡책을 주장)의 스승이었다. 중국 하남성 등봉현에 있는 골짜기 귀곡(鬼谷)에 은거했기 때문에 ‘귀곡자’ 또는 ‘귀곡 선생’이라 불린 그는 이름과 성씨 및 고향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성은 왕(王)씨고 이름은 후(詡)로, 제(齊)나라 사람이라 전해진다.
어떻든 손빈(孫臏)과 방연(龐涓, ?~기원전 342년)은 그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들어 있었다. 손빈은 제나라 사람으로 지금의 산동성 양곡·견성 일대에서 걸출한 군사 전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자신도 군사 이론과 실천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을 과시하였고, 탁월한 전공을 세웠다. 이 손빈이 청년 시절에 방연과 함께 병법을 배웠는데, 학업 성적이 늘 방연을 앞질러 그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학업을 마친 방연은 위(魏) 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위나라 혜왕(惠王)에 의해 장군에 임명되었다. 당시 제나라와 위나라는 중원(中原, 중국의 중심부)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대로, 방연은 자신이 손빈만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천성이 탐욕스럽고 음흉한 그(방연)는 손빈을 은근히 시기하고 경원시하고 있던 터라, ‘제나라에서 손빈을 기용하면 어떡하나’ 몹시 꺼려 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손빈을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위나라로 초빙했다.
손빈이 위나라로 오자, 이번에는 (위나라의) 혜왕이 뛰어난 손빈을 발탁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되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악하고 간사스러운 방연은 결국 손빈을 제나라의 첩자(스파이)로 몰아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형벌인 빈형(臏刑)을 가해 앉은뱅이로 만들고 말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손빈의 얼굴에다 죄인임을 나타내는 경형(黥刑, 묵형)의 흔적까지 남겼다. 물론 방연은 자신의 정체와 의도를 철저하게 숨긴 채, 그나마 손빈에게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일을 꾸몄다.
얼마 뒤 동문수학한 방연의 지독하고 천인공노할 흉계와 그 진실을 알아차린 손빈은 이를 갈아 부쳤다. 이때부터 그는 일부러 정신병자 노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간다. 그러던 중 다시금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에게 구출되어 몰래 위나라를 탈출할 수 있었다. 불굴의 의지로 사지(死地)에서 벗어난 손빈은 제나라에서 자신의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낸다. 우선 손빈은 이른바 삼사법(三駟法)을 창안해냈는데, 이것은 세 마리 말이 시합을 하는데 있어서 교묘하게 말들을 뒤섞어 상대를 2:1로 이기게 하는 전법이다.
이러한 일들이 인연이 되어 손빈은 제나라 위왕으로부터 군사(軍師, 지혜로써 장군을 보좌하는 벼슬)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대장군 전기를 도와 두 차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손빈 병법』이라는 군사 이론서를 남겼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방연은 숙적 손빈을 죽였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2편으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