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진 법성문화진흥원 고문
요즘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법성포 청년 남궁현이 시도하다가 2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던 운동이다.
“우리가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선혈 유족들의 구원 사업이 필요하다”
당시 법원의 판결문에는 「피고(남궁현)는 두 차례에 걸친 형을 복역한 뒤에도 반성 없이 범의를 계속하여 1932년 10월, 자택에서 정판갑과 만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 희생자 구제를 위한 기금 조달을 목적으로 굴비 기계건조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33년 1월 17일, 피고 김창한을 전북 남원읍 죽항리 전주여관에서 만나 말하기를 “우리가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선혈 유족들의 구원 사업이 필요하다. 그 방법으로 내 고향 법성포에서 많이 잡히는 조기를 선풍기로 급속 건조하는 기계를 고안하여, 일시에 대량으로 건조하는 방법에 성공한다면 연간 천 원 정도의 순이익을 올릴 수가 있다. 그것으로 구원 사업에 쓰자”라고 설득하니 주인 창한은 응낙하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의 국체를 변혁하고, 조선을 일본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운동을 펼친 죄로 징역 2년에 처한다.」"라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문에 언급된 정판갑(1905~?)과 김창한(1905~1950), 그리고 남궁현(1901~1940)은 모두 1920년대에 ‘신간회’에서 활동한 사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정판갑은 일본 와세다실업학교에서 수학 후 귀국하여 김제지회에서 활동하였고, 김창한은 남원지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남궁현은 할아버지가 총무로 재임하며 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법성포보통학교(현 법성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로 진학하여 2학년 재학 중 <전주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귀향하여 법성포청년회와 「중외일보」 법성포 지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영광청년동맹과 신간회 영광지회 창립을 주도했다. 이 때문에 소위 <신간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정판갑과 2년 6개월간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6개월 만에 앞서 언급된 <독립지사 가족 돕기 사업>을 펼치려다 1934년에 김창한과 함께 또다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그의 3번째 옥고였다.
「영광군지」엔 없고 「법성고을지」에만 있는 영광의 인물 남궁현
3번의 옥고를 치르고 1936년에 만기 출소하여 고향 땅, 법성포로 돌아온 남궁현 앞에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7년에 소위 <영광체육단사건>을 조작한 일제 경찰은 남궁현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1940년에 1심 선고 공판이 열려 남궁현은 금고 8월이 선고되어 형기 초과로 석방되었다. 이보다 앞선 공판에서는 법성포 출신 김철현, 나원각, 홍종식, 영광 출신 조주현(필명 조 운)에게 각각 징역 10월형이 언도되었고, 이들 역시 형기 초과로 모두 석방되었다. 결론적으로 영광군의 최대 옥사라는 <영광체육단사건>은 “일제 경찰이 지목했던 영광읍 내 인사들은 조 운을 제외하고 대부분 실형을 면하여 석방되고 법성포 내 출신들이 주도하였다.”는 날조된 재판이자 식자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추한 민낯이었다.
태어나 18살부터 4번에 걸쳐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남궁현은 1940년에 갓 2살 된 아들 성(城)을 뒤로 하고 조국 독립의 밀알이 되어 영면하였다.
법성면에서 발간한 법성면의 정사인 「법성고을지」 인명편에는 남궁현이 인물로 수록되어 있다. 또, 지난해(2024) 법성문화진흥원에서 발간한 「법성향지」에도 여러 사료와 함께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달리, 정부가 199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고, 2001년에 국가보훈처(보훈부)에서 선정한 독립지사 남궁현은 영광군의 정사인 「영광군지」 인물 편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전주시가 <전주 독립운동가 58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기리고 있다. 마땅히 기억해야 할 인물인데 영광군은 그렇지 않다. “기억을 넘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작은 실천은 무엇일까?” 광복 80주년을 맞아 자문해 본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