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철천지 원수로-흄과 루소(2)
많은 철학자들이 ‘루소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지만, 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지낼 수 있는 집까지 구하여, 서로 존중하면서 좋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친밀한 관계는 얼마 가지 못했다. 월폴(1717년~1797년, 영국 소설가)이 루소에 대한 풍자의 글을 영국 출판계에 발표하자 루소의 피해망상증이 재발하고 말았던 것. 루소는 이것을 흄의 탓으로 돌리며, ‘흄이 철학자들과 합세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믿었다. 흄은 자신의 결백을 루소에게 설득하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루소는 1767년까지 대번포트(영국 플리머스의 항구 도시)에 머물다가 말 한마디 없이 프랑스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흄이 그처럼 루소에게 자비를 베풀었을까? 스코틀랜드(섬) 출신으로 잉글랜드(영국 본토)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던 흄은 (앞 호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에서 최고의 찬사와 좋은 대접을 받았다. 반면, 루소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으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의회로부터는 단죄되었다. 성직자들이 선동한 군중의 돌팔매질을 받았고, 조국인 스위스에서마저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모두 1762년 루소의『사회계약론』과 『에밀』이 나오면서부터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사회계약론』은 봉인되었고, 『에밀』은 불태워졌다. 경찰은 이 책을 압수하는 한편, 루소에게 신체 구금의 형을 내렸다. 루소는 당시 프러시아에 속해 있던 뇌샤텔(프랑스와의 국경에 있는 스위스 도시)의 공국으로 피신하였고, 여기에서 국적을 얻는 대신 (스위스) 제네바의 시민권을 포기하였다.
이 무렵, 흄은 바로 이 53세의 망명객(루소)을 위해 영국에 은신처를 마련해줘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은 것이다. 물론 흄이 루소를 직접 챙긴 데에는 평소 자신의 소외감 경험이 한 몫을 거들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당시 흄이 루소에게 제안한 내용을 들어보도록 하자. “영국의 서적상들은 (프랑스) 파리의 서적상들보다 더 많은 인세(印稅)를 지급할 수 있으니, 당신이 조금만 노고를 무릅쓴다면 검소하게 생활하는데 어렵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이런 상황을 말하는 이유는 인류에게 은혜를 베풀면서도 어떤 보답조차 받지 않으려는, 당신의 단호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이에 대한 루소의 답변 역시 매우 호의적이었다. “당신의 선량한 마음은 내게 영광이자 감동입니다. 당신의 제안에 대한 최고의 답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는 감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5~6일 안에 당신 품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중략) 무엇보다 이는 같은 시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저명하며 선량한 마음이 그 명성을 뛰어넘는 당신에게 의지함을 기뻐하는, 내 마음의 충고입니다. 나는 평화롭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고독하고 자유로운 은신처를 간절히 원합니다.”
『에밀』이라는 명저를 남겼지만, 당시 루소는 불온한(?) 서적으로 인하여 많은 박해를 받으며 유럽 전역을 방랑하고 있었다. 이때 흄이 손을 내밀어준 것이다. 드디어 1766년 1월 10일 저녁.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영국 해협. 폭풍으로 항구에 발이 묶여 있던 여객선 한 척에 영국인 외교관과 스위스인 망명객이 함께 올랐다. 물론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은 목적지인 영국의 도버 항구 쪽을 바라보며, ‘서로를 영원히 존경하고 우정을 함께 나눌 것’을 굳게 약속했다. 앞으로 18개월 동안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영광 백수 출신,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강성률 철학티비’, ‘강성률 문학티비’ 운용중)
